주님의 무덤 앞에서 죄와 허물을 벗어던지자.
한 사람이 모든 이를 대신해서 죽고 초라한 무덤에 조용히 묻혀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 죽음이 두렵고, 외롭고, 고통스럽기까지 했음을 잘 아시면서도 꿋꿋이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 길을 그대로 걸어가셨습니다. 모두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과 어두운 무덤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결코 낭만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을 예상하고 잠시 참아 넘긴 연극이 아니었습니다. 서럽디 서러운 비명횡사, 처절하디 처절한 비극 그 자체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진리만을 전하고 증거한 그분을 짓밟아 버린 세상의 폭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회에서 가장 저주받은 자로 가장 불순한 자로 몰렸습니다. 종교적으로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신성모독자, 정치적으로 사회에서 제거되어야할 체제 전복자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최후는 그토록 외롭고 서글프고 처절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숱한 사람들이 그분을 전부 떠나가고 배신합니다. 일개 갱집단이라해도 우두머리를 따라 목숨을 던지는 졸개가 한두명 씩은 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조리 도망쳐버립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실패하였음을 절감합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골방에 들어가 문을 꼭 잠그고 벌벌벌 떠는 일뿐이었습니다. 예수 추종자로 발각되면 곧 목숨을 내놓아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승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고통을 당합니다. 베드로처럼 통곡하는 마음이 다른 모든 제자들의 마음이었던 겁니다. 유다는 죄의식에 못이겨 생명까지 끊지 않았습니까? 제자들의 두려움과 고통과 죄책감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땅이 꺼져라 한숨밖에 쉴 수 없는 그 어둠과 절망.
우리는 흔히 죽음을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끝이고 모든 것과의 단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자기를 버리고 죽음을 택함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이제 곧 우리들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 돌아가셨고 묻히셨습니다.
연극을 볼 때 그 연극이 몇 막까지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주인공의 실패나 죽음으로 이제 연극이 끝났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연극이 몇 막까지 있는지 아는 사람은 이제 그 다음에 시작될 막에서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지 기대하게 됩니다. 죽음은 분명 사라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죽음이 인생의 연극에서 마지막 막이 아님을 믿고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도 그분의 죽음에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찬란한 영광만을 바라기 전에 죽고 묻혀야 하는 것입니다.
내 뜻을 죽이고...내 욕심을 죽이는 것...그것들을 지금 내가 죽이고 묻을 수 있을 때.. 진정 그것이 주님의 길을 따르는 모습일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은 슬프지만 마냥 슬픔에 잠겨있을 수는 없는 날입니다. 우리를 살리실 주님의 무덤 앞에 엎드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돌아보면서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신 주님의 무덤 앞에서 죄와 허물을 벗어던져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주님의 부활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강우 신부 -
출처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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