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2008년 2월 23일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도구 Ludovicus 2008. 2. 23. 09:19

 

                          

                        2008년 2월 23일 사순 제 2주간 토요일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부모 노릇은 잘하고 계신가요?


  어려서부터 자식노릇과 부모노릇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무엇이 아버지의 임무이고, 역할이며, 해야 할 일이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무엇을 해야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며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나는 대식구의 장남으로 어렵게 동생들을 키우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도 잘 해 준 것 없이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내가 고생한 것의 열배, 백배는 더 어렵게 살았습니다. 내가 젊어서는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이런 때 어떻게 했을 것인가?’ 생각하며 아버지의 노릇을 흉내 내면서 정말 악착같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훌쩍 커 버린 아이들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고 다 큰 자식들을 대하면서 이제는 아버지의 노릇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봅니다. 이제는 돈도 없고, 건강이 좋지 못해서 아버지의 역할을 잘 하지 못하면서 자신을 반성하는 것으로 매일을 지냅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보면 내가 잘못 산 것이 매일 더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가슴이 더 아파옵니다. 유산으로 물려주거나 나누어줄 재산도 없고, 신앙의 모범도 되지 못하여서 매일 죄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언제나 욕심은 풍선을 불듯 커지고 있지만 매일 하나씩 터져 나오는 소리가 가슴을 울리고 귓전을 때립니다. 아버지의 역할과 자식의 역할을 못하고, 정말 초라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인생을 다시 설계하게 된다면, 정말 새롭게 설계하고 싶은 생각도 들게 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며, 천리(天理)의 법칙입니다.

 

조금도 자랑할 것이 없으며, 자식에게 알아달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냥 부족하고 못한 것만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으로 효성을 다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백분의 일만큼 사랑하고 효성을 바친다고 하여도 무지하게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효성을 다하라는 가르침을 어려서부터 배웠지만 아버지가 되는 것은 배우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되어서도 내가 어떻게 해야 정말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지금도 모르겠는 것입니다.

 

그 동안 효의 개념도 많이 변했고,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도 많이 변했나 봅니다. 그리고 효성의 방법도 정말 많이 변했나 봅니다. 자식들은 자기만을 위해주고, 받들어 주기를 바라고 그렇게 성장해서 이제는 부자간의 친(親)함이나 사랑이나 섬김은 많이 없어졌습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생각하는 것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존속 살해나 폭행도 비일비재하고, 어린 자식을 죽이고, 학대하고, 구박하고, 그렇게 사는 부모들이 많아지고, 그렇게 잘못하는 자식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재산을 나누어주시는 아버지는 참으로 떳떳하고 자식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입니다. 그 분이 하느님이시니까 그렇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재산을 나누어달라고 떼를 쓰며 방탕한 생활을 하는 둘째 아들은 지금 나의 모습입니다. 그는 비싼 수업료를 내고 인생과 아들의 역할과 아버지의 사랑과 통회의 정신과 용서의 깊은 진리를 배웁니다. 나는 오늘 복음을 묵상할 때마다 아버지의 그 자애로움 뒤에 숨어있는 부성애가 더 마음에 닿는지 모릅니다.

 

   인정과 의리로 기업경영을 하여 세계에서 최고의 경영자라고 불리는 대만의 신광그룹의 창설자 우호수 회장은 직원이 횡령하여 도주하였는데 횡령 금액은 묻지 않고 “그 사람, 아이들이 몇이 있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많이 둔 아버지는 횡령이라도 해서 아이들을 잘 먹이고, 입히고, 좋은 교육을 시키고 싶은 것입니다. 자식들이 하나도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도 하지 않고, 효도도 바라지 않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 부모의 마음을 자식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군자유어의 소인유어이’(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라는 말이 논어의 이인편에 있습니다.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견리사의(見利思義)나 견리망의(見利忘義)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부자(富者) 되십시오.’라는 인사가 ‘견리사의’에 의한 부자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잘못 산 것을 최소한이라도 뉘우치며 살 수 있는 자식이 되어야 한다는 소망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순교자와 함께하는 하루-

 

저는 하느님 다음으로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성모님의 기적 상본을 내보이면서

“겁내지 말라.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모님이 여기 계시다.”는 말로 가능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열여섯 번째 편지 중에서)   

       
       ~ 이창순 야고보 선생님의 묵상글 ~  
           

 

 

 

 


     


출처 : 사랑이 머무는 자리
글쓴이 : 요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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