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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 † / 박상대 신부님

도구 Ludovicus 2008. 2. 11. 08:40

†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 †
-박상대 신부 -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으로서 최후의 심판에 관한 내용이다. 달리 보면 이는 가르침이라기보다 최후의 심판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이다.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태오복음 22장에 기록된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끝난다.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骨子)라는 것이다.(22,39-40)
그 다음부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준비하는 26장까지는 예언말씀이다. 예언말씀은 구체적인 데서 보편적인 것에로 확대하여 언급된다.(23-25장)

예수께서는 우선 '사랑의 이중계명'을 기준으로 놓고, 가르치고 말만하며 정작 행하지 않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탓하시고, 그들에게 7가지 불행을 선언하시며,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유다인들의 멸망을 예고하신다.(23,1-35)

그리고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세상의 종말과 종말의 징조들을 예언하신다.(23,37-24,28) 그 다음 부분은 ① 인자의 내림(來臨)에 대한 예언, ② 미정(未定)인 종말의 날의 시간에 대한 언급, ③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 ④ 열 처녀의 비유, ⑤ 달란트의 비유, 그리고 ⑥ 최후의 심판에 관한 예언으로 이어진다.(24,29-25,46)

번호를 매긴 이 부분의 대목들을 잘 살펴보면 ②~⑤를 빼고 ①과 ⑥을 직접 연결시킬 때 더 자연스러워 보임을 알 수 있다. 즉 ① 인자의 내림예언(24,29-31)과 ⑥ 최후의 심판예언(25,31-46) 사이에 ②~⑤의 말씀이 삽입되었다는 말이다. ①과 ⑥이 직접 연결될 수 있는 구절들을 읽어보자. ① "그러면 하늘에는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고 땅에서는 모든 민족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을 것이다. 그 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어 그가 뽑은 사람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불러모을 것이다."(24,30-31)

여기에 오늘 복음의 시작부분을 직접 연결하여 보자. ⑥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들을 갈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25,31-33) 이렇게 두 대목이 매끄럽게 연결된다. 마태오도 복음을 집필할 때 처음에는 이 두 대목을 바로 연결하려고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기원후 70년에 실제로 있었던 예루살렘의 멸망이 곧바로 세상종말과 인자내림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곧 있을 것으로 믿었던 세상종말과 인자내림이 지체하게 되자 80년 이후 마태오가 복음서를 실제로 집필할 때 ②~⑤를 삽입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②~⑤의 대목이 보여주듯이 ① 인자의 내림과 ⑥ 최후의 심판을 대비하는 일이다. 이는 마태오복음 공동체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은 비중으로 적용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다가올 인자의 내림을 깨어 기다리고, 내림 하실 인자께서 주관하실 최후의 심판을 잘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최후심판을 잘 준비하는 것인가? 오늘 복음을 잘 살펴보자. 천사들을 거느리고 영광에 싸여 오신 인자가 왕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불러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두 부류로 나눈다. 이는 낮에 양과 염소가 들판에서 함께 풀을 뜯어먹다가 밤이 되면 각각의 우리에 드는 것과 같다.

양과 염소로 갈리는 기준은 사랑과 자비를 '행함'과 '행하지 않음'이다. 여기서 의미 있게 보아야 할 대목은, 인자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고, 갈려선 사람들은 이를 서로 다른 인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푼 의인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이웃이 '주님'인 줄을 몰랐다고 말하고 있으며, 사랑과 자비를 베푼 적이 없는 자들은 도움을 받아야 할 이웃이 '주님'이었다면 모른 체하지 않고 기꺼이 베풀었을 것이라며 변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양쪽의 말을 다 일축하고 각각의 경우를 '나에게 베푼 것'과 '나에게 베풀지 않은 것'으로 대별하신다. 결국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주님)에게 해 준 것이다"(40절)는 말이다.

양과 염소처럼 갈려선 사람들은 누구도 이렇게 될 줄을 몰랐다. 오직 인자만이 그런 기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비유가 아니라 최후심판에 있을 실제상황이다. 최후심판의 실제상황에서 세상창조 때부터 마련된(34절) '영원한 생명의 나라'와 '영원히 벌받는 곳'의 구분은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점은 이 보상에 대한 결정이 최후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실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느냐 않느냐에 따라 이미 보상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 바로 종말에 왕좌에 앉아 최후의 심판을 주관하실 '주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原理)는 예수님의 공생활 중 가르침에서 이미 드러났다. 산상설교(5-7장)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예수께서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7,21)고 하신 말씀을 상기해 보라.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고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 쉬운 듯 하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 때 그가 '주님'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좋다. 그것은 단지 인자의 심판기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에서 주님은 '네가 자비를 베푼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그가 바로 나였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오늘 복음은 부활시기가 아닌 시기의 장례미사 복음으로 지정되어 있다. 물론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복음들도 있지만 이 복음의 '내용이 길다'는 이유로 집전자 측으로부터 선포가 거절되는 경우도 많다. 장례미사에 더러 비신자들이 참석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들에게 이 복음보다 더 좋은 가르침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되도록 오늘 복음이 장례미사의 복음으로 선포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출처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글쓴이 : 촌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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