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간 금요일>(091113.금)
<최후의 심판>
교황청에서 어떤 분을 성인으로 선포하기 전에, 그러니까 시성식을 하기 전에
먼저 아주 까다로운 심사를 하게 됩니다.
제가 교황청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알지는 못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인 심사는 보통의 재판처럼 이루어지는데,
그분의 결점과 흠을 고발하는 검사가 있고,
그분의 성덕과 업적을 변호하는 변호사가 있다고 합니다.
(실제 명칭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변호사는 그분이 성인이 되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검사는 그분이 성인이 되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모든 증거 자료와 문서들이 수집되고, 검토되고,
모든 증인들의 증언을 청취하고,
글자 그대로 재판처럼 공방을 벌인다는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모든 삶을,
남긴 글이나 발언 하나하나를,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심사한다고 합니다.
특히 검사 쪽에서는 먼지만한 잘못이라도 다 찾아낸다고 합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있겠냐?, 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 더 이상 나올 먼지가 없을 때까지 철저하게 조사한다고 하더군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성인이 될 만 하다고 결정되면
그때서야 시성식을 하고 성인으로 선포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통 심사 기간이 백 년씩 걸립니다.
그 심사 기간이 비교적 짧았던 성인은
2차 세계대전 때 다른 사람 대신에 죽었던 꼴베 성인이고,
다른 성인들보다 기간이 오래 걸린 분은 아마도 쟌 다르크 성녀일 것입니다.
쟌 다르크 성녀는 마녀라는 죄목으로 화형을 당했으니
마녀가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절차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마녀라는 죄목으로 죽었다가 성녀로 선포되기까지 오백 년이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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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최후의 심판도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전해지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심판을 받기 위해 하느님 앞에 서게 되면
먼저 천사 하나가 그 사람의 죄를 고발한다고 합니다.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지은 모든 죄를...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지은 죄 전부,
해야 하는데 하지 않은 일들까지 전부 다.
그 죄가 크든지 작든지 아주 세세하게 몽땅 다 고발한다고 합니다.
(과연 그 고발의 시간을 견뎌낼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고발이 끝나면 변호인이 변호를 하게 되는데...
누가 우리의 변호를 맡아줄까요?
첫 번째 변호인은 바로 우리가 믿었던 예수님입니다.
두 번째 변호인은 성모님이고...
세 번째 변호인은? 아마도 ‘사랑과 선행’일 것입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실천했던 우리 자신의 선행과 사랑이
바로 우리를 변호해줄 것입니다.
(선행과 사랑이 하나도 없다면? 엄벌을 각오해야겠지요.)
하느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실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과연 정상참작을 해주실지 어떨지...
예수님께서 우리의 변호인이 되어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긴 한데...
조건이 있습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을 얼마나 잘 실천했는가?
성모님이 우리의 변호인이 되어주신다는 것이 우리를 안심시킵니다.
조건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냥 우리가 매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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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한 침상에 있는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함께 맷돌질을 하는 두 여자’는 어머니와 딸, 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입니다.
부부라고 해도, 모녀간이라고 해도
하느님의 심판 때에 처지가 달라질 것입니다.
무임승차 같은 것은 없습니다.
자기 죄에 대해서는 자기가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가족의 기도 덕분에 지옥행을 면할 수는 있겠지만,
보속은 그대로 다 해야 할 것입니다.
회개는 가족이 대신 해줄 수 없습니다. 스스로 해야 합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루카 17,31-32)
이 말씀의 첫 번째 뜻은 ‘시간이 없다.’ 라는 것입니다.
옥상에서 집안으로 들어갈 정도의 시간여유도 없고,
들에서 집으로 돌아갈 정도의 시간여유도 없다는 뜻입니다.
종말과 최후의 심판이 닥치면 그것으로 상황 끝입니다.
그때서야 회개를 하겠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두 번째 뜻은 세속의 것들은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전쟁이 나서 피난을 가게 될 때
우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먼저 챙기게 되는데,
종말과 최후의 심판 때에는 아무것도 챙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목숨을 지켜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종말을 대비해서 방독면과 라면과 생수를 사놓는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럴 돈이 있다면 너무 늦기 전에 그 돈으로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이
종말을 대비하는 더 좋은 방법입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17,26)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17,28)
이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무방비 상태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루카 17,27. 28)
이 구절들은 죄 짓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표현한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이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출근하고, 학교가고, 먹고. 자고, 놀고, 일하고...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고, 내일도 그렇게 살고,
그러다 갑자기 종말과 심판이 닥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도 없는 맨땅에서 배를 만드는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지금도 거룩하게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비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놀고 더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남에게 피해 안 주고 나 혼자서 즐기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그것이 사람의 기준으로는 잘못도 아니고 죄도 아니라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 기준으로는 죄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심판의 기준은 ‘선행’이고, 공심판의 기준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남에게 피해만 안 주면 그만이지, 내 재산으로 내가 즐기는 것이 무슨 죄냐고?
그런 이기심과 오만함 자체가 바로 큰 죄라고
예수님께서 지적하십니다.(마태 25,45)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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