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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제32주간화요일(091110.화)

도구 Ludovicus 2009. 11. 10. 07:37

<연중 제32주간 화요일>(2009. 11. 10. 화)(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루카 17,9)

 

강론을 준비하다 생각해보니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고맙다고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린 것 말고는

사람에게 고마워하시는 모습은 복음서에 없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사람들,

예루살렘 입성 때 어린 나귀를 빌려준 나귀 주인,

최후의 만찬 장소를 빌려준 집주인...

 

예수님께서 고맙다고 말씀하셨을 것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그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마워할 줄 모르는 예수님이셨을까???

아니면 복음서 저자들이 그런 말은 기록할 필요를 못 느낀 것일까??

 

구약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천사가 나그네 모습으로 사람들을 찾아오는 장면들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나그네를 귀한 손님으로 극진히 대접합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천사들은 그 대접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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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하느님 말씀이라고 해도 사람의 손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특히 신약성경 복음서의 경우에는

예수님 승천 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부터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모아서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도들과 제자들이

그 믿음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기록한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들도 많이 기록되었지만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의 모습과 가르침이 복음서의 주요 내용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바친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천사를 접대하는 것도 사실은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었고,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는 것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차원에서 드린 것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감사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고마워하는 모습이나 말씀을 생략했을 것입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대접을 받고 고마워할 줄 몰랐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라는 말씀의 뜻은

“하느님께 뭔가를 바쳤다고 해서 하느님께 고마워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주인과 종으로 비유되긴 했지만,

그 비유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해야 맞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모두 감사 예물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고마워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고마워해주시기를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고마워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칭찬하시는 분이고, 상을 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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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7,10)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사도들에게 해당되는 가르침입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성직자들에게 해당되는 가르침입니다.

 

서품식의 축하식 때, 또는 새신부들의 첫미사 축하식 때

새신부들의 답사를 들어보면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를 받았고 그 은혜에 감사드린다는 답사를 합니다.

모두 가 다 그렇게 말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르면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를 받은 것에 감사를 드리는 태도는 희미해지고

신부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는 모습이 조금씩 커져갑니다.

 

서품식 때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종으로서 가장 겸손한 모습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목에 힘을 주게 되고

종의 모습이 사라지면서 특권층의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모든 성직자들은(교황, 추기경, 주교, 신부들 모두 다) 죽는 날까지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는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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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에는 졸업식이 없습니다.

입학식은 있습니다.

 

신학교 입학식은 다른 대학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졸업식은 없습니다.

마지막 학기 기말고사 끝난 뒤에 각자 짐 챙겨서 집에 가면 그만입니다.

 

대학 4년을 마치면 모두 다 바로 대학원에 들어가기 때문에

대학 졸업식은 별로 의미가 없어서 안 할 것입니다.

대학원 졸업 후에는 교구별로 서품식을 하기 때문에

학위 수여식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졸업식이 없으니 이런저런 시상식은 전혀 없습니다.

수석 졸업자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수석 입학자는 공개를 했던가... 안 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

 

신학생들에게는 남들처럼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되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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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전에 어떤 본당에서 다른 본당으로 발령을 받아 떠나게 되었을 때

사목회 임원들이 저에게 공로패인지 감사패인지를 만들어 주려고 했습니다.

저는 펄쩍 뛰면서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이제까지 신부들이 발령을 받아 떠날 때

그런 것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신부들에게는 신부로 충실하게 살다가

신부로 죽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상을 준다면 하느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뭔가를 받는다면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상만 줄어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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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일을 잘 했다고 상을 주고 훈장을 주고

무슨 기념비 같은 것을 세우는 것은 세속의 방식입니다.

 

교회에서 그런 세속의 방식을 흉내 낼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성직자들이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긴 하지만,

성직자들의 존재 이유는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이 알아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뭔가를 남기려는 욕심도 버려야 합니다.

남긴다고 해도 남아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후세 사람들이 기억을 하든지 말든지, 교회 역사에 이름이 남든지 말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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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이 알아주든지 말든지, 라는 마음으로 봉사를 해야 합니다.

 

조선 천주교의 순교자가 만여 명입니다.

지금 그중에 103분만 성인 명단에 들어 있습니다.

 

나머지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이름마저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그분들도 위대한 성인으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103분의 성인들은 당연히 위대한 순교자이고 성인들이지만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나머지 무명 순교자들도 위대한 분들입니다.

 

깊은 산골짜기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하면서 교회를 지켜낸

교우촌의 신자들도 위대한 분들입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누구에게 상을 주겠습니까?

우리는 다 함께 같은 주님을 모시는 같은 종인데...

 

본당별로 경쟁을 할 것도 없고,

본당 안에서 구역별로 경쟁을 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는 세속의 사고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이런저런 시상식... 폐지하는 것이 옳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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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r.송영진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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