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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제27주간월요일(091005.월)

도구 Ludovicus 2009. 10. 5. 07:49

<연중 제27주간 월요일>(2009. 10. 5. 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에

그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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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학자의 질문의 속뜻은 이런 것입니다.

"누구에게, 어떻게, 얼마나 도움을 주어야 '이웃 사랑'이 됩니까?"

 

이 질문은 자기 자신은 도움을 주는 우월한 위치에 두고,

다른 사람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열등한 위치에 두는 태도입니다.

오만하고 잘난체 하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누가 나의 이웃이냐?" 라고 묻지 말고,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하는가?" 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그말이 그말 같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른 말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도움을 주는 우월한 위치에서 내려와서 도움을 받는 입장에 서라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나 --> 사랑 --> 이웃" 이 아니라,

 

"이웃 = 사랑 = 이웃" 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말씀의 뜻은 이렇게 됩니다.

"은혜를 베푼다고 생각하지 말고, 받은 은혜에 보답한다고 생각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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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불우이웃 돕기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웃 사랑 실천은 이웃과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불우이웃 돕기 성금 좀 내고 나서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고 잘난체 하지 말아야 합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방적으로 주는 입장에만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살다보면 받을 때도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서로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살아갑니다.

즉 은혜를 베풀고, 은혜를 받으면서 삽니다.

 

받은 것은 금방 잊어버리거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준 것은 오래 기억하고, 생색내고, 특별한 선행이라고 생각한다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이란 일방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일방적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잘 살고 있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남을 도울 수 있다면,

남을 도울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앞으로 도움을 받을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전에 받았던 은혜들을 갚을 기회가 생긴 것을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남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고요?

거짓말입니다.

 

황제의 아들, 딸로 태어나서,

즉 왕자와 공주로 태어나서 가난했던 적이 없다고 해도

남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받은 은혜와 사랑만큼만, 딱 그만큼만이라도 사랑을 베푼다면,

그것은 굉장히 많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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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와야 할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고 오만한 질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은 너무나도 적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은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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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에 예수님께서 복음서의 내용과 다른 방식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다면...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길을 가다가 사제, 레위인, 강도 당한 사람을 만났다.

자 그 세 사람 중에 누가 사마리아 사람의 이웃이냐?"

 

율법학자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라고 질문을 했으니,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율법학자는

'강도 당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의 이웃입니다.' 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에게

'너도 가서 그렇게 불쌍한 사람을 찾아서 도와주어라.' 하셨을 것입니다.

 

만일에 복음서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면,

참으로 평범하고 단순한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이웃 사랑이란 불우이웃 돕기를 잘 하는 것이다, 로 결론지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라고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만일에 네가 길을 가다가 강도를 당했다고 하자."

"그런데 사제, 레위인, 사마리아 사람이 차례로 지나갔다."

"동족인 사제와 레위인은 그냥 지나쳤지만, 이민족인 사마리아 사람은 너를 도와주었다."

"너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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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은 우리 자신이고, 사마리아 사람은 우리를 도와준 익명의 어떤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그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하나 더 진행됩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강도를 만난 사람은 우리가 도와야 할 익명의 어떤 사람이고,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해석할 때,

 

옛날 성서학자들은

강도를 만난 사람은 우리 자신이고,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을 나타낸다고 해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쌍한 처지에 있는 우리를 도와주셨으니,

우리도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 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지금의 성서학자들은 다르게 해석합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예수님이고,

우리가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성경 안에 있습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에 근거를 두고 해석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뜻은 같습니다.

예수님의(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았다면, 그 사랑을 이웃에게 갚아라, 라는 것입니다.

 

사랑 받은 적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도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잘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마음에는 다른 계산이 숨어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아닌, 이해타산, 손익계산, 명예욕, 허영심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를 깨닫는 사람만이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사랑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부모, 가족, 친구, 동료, 이웃으로부터,

그리고 수많은 익명의 어떤 사람들에게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순서입니다.

 

사랑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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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곤경에 처한 어떤 사람을 도울 기회가 생긴다면,

나에게 선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 그 사람에게 감사할 일입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은 도와준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겠지만,

나에게 선행을 할 기회를 만들어준 그에게 나도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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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r.송영진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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