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강론.묵상

[스크랩] 연중 제22주간 월요일(2009. 8. 31. 월)

도구 Ludovicus 2009. 8. 31. 07:52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다.

 

8월 31일의 복음 말씀 내용은...

 

루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시는 부분입니다.

광야에서의 단식을 마치시고, 마귀의 유혹도 물리치시고,

그리고 카파르나움을 거쳐서 고향 나자렛으로 가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행하셨던 기적을

고향에서도 행하라고 요구할 뿐,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만 남기고 고향을 떠나십니다.

 

'희년'이란,

50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일종의 축제였습니다.

희년에는 모든 것이 원상복구되었습니다.

빚은 모두 탕감되었고, 노예는 모두 해방되었고,

재산은 모두 원래의 주인에게로 되돌려졌습니다.

 

그런데...

 

희년 제도가 제대로 실천된 것은 율법이 선포된 초기였을 뿐이고,

왕들이 독재를 하면서, 또 나라가 망하면서,

서서히 흐지부지 되다가 예수님 당시에는 유명무실했던 제도입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상황에서

모든 것을 원상복구 시킨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희년이란 기득권자들이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 주요내용입니다.

돈을 꾸어주었더라도 희년에는 그 빚을 돌려받는 것을 포기하고,

집과 땅 같은 재산도 원래의 주인들에게로 돌려주어야 하고,

노예들은 모두 조건 없이 해방시켜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가진 것 없는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희년이 되었지만,

부자들, 권력가들에게는 억울한 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희년이 가까워질수록 이자율이 높아지는 폐단도 있었습니다.

희년이 가까워지면 돈을 빌리는 것이 아주 어려워졌겠지요.

희년이 얼마 안 남았다면 누가 돈을 꾸어주겠습니까?

왜 그 제도가 유명무실하게 되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만 합니다.

 

그래서 희년이란 기득권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있으나마나 한 제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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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0년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대희년을 선포했었습니다.

지금 세월이 조금 지나고나서 생각해보면,

대희년을 선포해서 이런저런 행사가 많았던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신학 세미나 같은 그런 것 저런 것들은 있었던 것 같은데...

뭐가 달라진 것이 있었는지... 아무 기억도 안 납니다.

 

신학은 있었던 것 같은데 신앙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는 느낌.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대희년을 선포했었다는 기억뿐입니다.

그리고 진짜로 기억나는 것은

그 다음해에 미국에서 9.11 테러가 발생하고

중동지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 정도.

 

왜 대희년과 그 다음해의 전쟁이 겹쳐져서 기억이 되는 것인지...

대희년에 대한 기대감을 너무 크게 가졌다가

급속도로 관심이 다른 데로 옮아간 것 때문인지...

 

희년이라고 하든, 대희년이라고 하든,

그 근본 정신은 '해방'에 있습니다.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모든 기득권으로부터의 해방...

 

대희년을 선포한 교황님의 의도는 분명 그런 것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구호나 정하고 일회성 행사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면서 대희년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달라진 것이 뭐가 있습니까?

 

조당에 걸렸던 사람들이 대희년에 모두 조당이 풀린 것도 아니고,

교무금을 모두 다 탕감 받은 것도 아니고,

교구에 납부할 각 본당의 교구비가 탕감된 것도 아니고...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직접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긴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교황님 탓이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의 탓입니다.

대희년을 그냥 행사로만 치르고 그 정신을 살려내지 못한 우리들 탓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대희년이 그렇게 그냥저냥 지나갔기 때문에

가톨릭의 대희년 선포가 일반 사회에 무슨 영향을 준 것도 없습니다.

 

그 시절 사람들은 밀레니엄 버그 따위나 걱정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교황님의 교서는 금방 잊어버리고

부시와 오사마 빈라덴의 싸움에서 누가 이길까, 그런 것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대희년은 그냥 추억으로 지나가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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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희년을 선포하신 것은

분명 기득권자들에게 기득권을 포기하라는 촉구였습니다.

"메시아를 맞아들이려면 우선 기득권부터 포기해라."

그것이 바로 회개이고,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는 준비자세이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나자렛이라는 그 작은 마을,

그리고 대부분 가난했던 그 마을의 사람들,

어쩌면 포기하고 말고 할 재산 같은 것도 없었을 것 같은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만 욕심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이 적은 사람들도 욕심이 많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더 욕심이 클 수도 있습니다.

돌려받을 것보다 돌려주어야 할 것이 더 많다면,

(남들이 보기에는 그게 얼마 안 되는 금액이라도)

누구든 희년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희년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예수님을 죽이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꾸어준 돈을 돌려받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고,

지금 가지고 있는 집이나 땅을 원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 그런 걸 선포하는 가난한 목수 아들은 그냥 제거해버리자, 라는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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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희년의 정신을 일상적인 삶에서 실천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특별히 정해진 때에만 희년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늘, 항상, 언제나, 지금의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해서,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언제라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우리는 정말,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이웃에게 꾸어준 돈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원래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드릴 수 있습니까?

집, 땅, 차. ...  그리고 자신의 생명까지.

 

원한, 미움, 증오, 억울함, 그런 것들을 다 비워낼 수 있습니까?

억울하다, 억울하다, 억울하다... 계속 반복하면서 그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소연 하는 기도,

그런 기도를 멈추고, 그냥 다 잊고 용서하겠다, 라고 기도를 바꿀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믿는다면 믿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남을 억압하고 있는 것들, 또는 내가 나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것들,

그런 것들에게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곧 희년의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희년'은 '제안'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우리가 희년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은

예수님께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출처 : 초남이에서 치명자산까지
글쓴이 : 도구/루도비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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