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수호자로서 소화데레사 성녀의 80주년 기념(요약본)
선교국장 다마소 자우아자우아
비오 11세의 결정으로 1927년 12월14일 예부성성(Cogregation of Rites)에서는 소화데레사 성녀를 모든 남녀 선교사들의 수호자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래서 소화데레사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같은 칭호가 주어졌고 교회전례도 똑같은 자격으로 이루어집니다. 바오로 사도 이후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과 마찬가지로 리지외의 가르멜 성녀도 선교에 대한 중요한 직책을 나눠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소화데레사가 15세의 나이에 가르멜에 입회하신 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그분은 결코 가르멜을 떠나신적이 없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이미 1748년 ‘코드갑(미국 메사추세츠 동남부에 있음) 동쪽 대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았고, 1904년 ‘신앙 전파의 수호자’라고 명명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두 수호자를 함께 두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 까 자문해볼 수 있겠습니다.
1. 먼저 고려할 사항 교회가 성녀 소화데레사에게 부여한 여러 칭호 중 선교의 수호자라는 칭호가 어쩌면 최근에(1997년) 교회박사라는 칭호보다도 더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동방지역 복음화의 명성을 가진 예수회원에 비견된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소화데레사는 선교지역으로 간적도 없고, 수도원을 한번도 떠난적이 없이 선교의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수도생활 모토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서 사랑받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소화데레사가 선교 수호자로 선포되기 전 그러니까 1923.4.30일 복자품을 받았던 때 이미 그녀는 가르멜의 선교 수호자로 선포되었었습니다. 1921년 “가르멜과 선교”라는 잡지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아기예수의 데레사 그분의 뛰어난 선교영성이 모두에게 알려진이래로 우리의 거룩한 어머니 데레사 다음 우리가 우리의 모든 선교사업을 그분에게 의탁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영혼을 차지할 수 있도록 가르멜에 심어진 작은 꽃인 당신에게 우린 선교와 선교사, 잡지사업, 협력자, 가족과 고향외에 당신의 형제들의 수많은 궁핍을 경감시켜주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당신에게 의탁합니다.” 1926년 7월29일에 교회차원에서 비오11교황은 소화데레사를 성직자(선교사가 아닌 토착민에 의한)나 성베드로사도의 교황청선교사업의 수호자로 선포하였습니다. 소화데레사의 선교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린 그분께서 사시던 환경에 대한 신학적 관련성, 역사적 배경과 그분의 나라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데레사 정신을 반영하는 선교사업에 대한 생각들을 고찰해봅시다. : “영혼을 구하는 것은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갑시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가 자신들을 위해 얻으신 구원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사이에 살면서 일합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속죄의 피로 그들이 구원받도록 이끌어 주고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고 그들이 교회안으로 들어가도록 도웁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기도로 한데 묶고 예수님께 그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제2차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선교활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선교활동의 목적은 복음화와 아직 뿌리내리지 않은 사람이나 집단사이에 교회를 심는 것입니다.” 교황 요한바오로2세의 선교회칙 “Redemptoris missio"에서 다음과 같이 선교 봉사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교사는 활동안에서 관상자가 되어야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과 개인과 공동체의 기도안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셨습니다. “전통적인 영성을 가진 비그리스도인 특히 아시아지역 사람들과 만남을 통해서 안것은 선교의 장래는 관상에 대한 확장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선교사가 관상적이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믿을만한 방식으로 선포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소화데레사가 자신의 삶안에서 선교사적이었다는 우리의 인식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같은 수호자로 선포된 그녀의 존재가 마치 교회에서 동일한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관계는 교회안의 역사에서 빈번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성베드로와 성바오로의 경우, 베드로사도는 교회의 권위를 구체화시키고 형성시켰으며 이방지역의 사도는 당신 자신의 카리스마적 차원을 드러냈습니다. 대 바실리아 성인과 나지안즈의 주교이며 학자인 그레고리오 성인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바실리아 성인은 동방교회수도원의 법제화와 리더쉽과 조직력에 대해서 존경을 받았던 반면 그레고리오 성인은 관상자이고 시인입니다. 그 외 베네딕도성인과 스콜라스티가 성인, 프란치스코성인과 글라라성녀, 예수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요한 등 현대의 다양한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소화데레사의 풍성한 카리스마와 복음화를 위한 추수일꾼을 위해 기도한다는 그녀의 원의를 삶으로 육화시킨점은 소화데레사가 선교의 수호자가 될수 있었던 면모인것입니다.
2. 부르심과 카리스마 소화데레사의 고향인 프랑스는 풍성한 선교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1850년부터 시작하여 그곳에 중요한 많은 선교수도회가 생긴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노르만디 지역은 동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소화데레사가 톤킨에서 순교한 젊은 노르만디인 세오판네 벤나드와 연관되어 있음을 압니다. 1861년 리지외 가르멜은 노르만디 사도 대리인의 권하에서 사이곤 수도원과 함께 첫 선교사창립지를 설립하였습니다. 리지외 가르멜의 두명의 영적형제인 알폰스 룰랜드와 마우리체 벨리에르는 또한 노르망디 사람입니다. 어린 소화데레사의 선교사명에 대한 깨우침은 1886년 “회개”의 은혜를 받은 크리스마스때 나타납니다. 소화데레사는 그 은총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분의 사도와 같이, 주여 나는 밤새 고기를 잡았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그분은 저를 영혼을 낳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나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사명에 대한 큰 갈망을 느꼈습니다. 나는 전에 그토록 강한 원의를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첫 예가 살인자였던 프란질리의 경우입니다. 그는 소화데레사의 첫 영적 아들이 됩니다. 선교사 수녀들에 대한 연보를 읽은 후에 데레사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계속해서 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뜨거운 갈망 때문에 선교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가르멜 수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가르멜에서 소화데레사는 자신의 선교소명을 관상적 견지에서 이해하였습니다. “나는 영혼들을 구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하였던 그녀는 생애 마지막 즈음(1897.3.19) “내가 죽은 후에도 영혼을 구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수도생활의 원칙을 “선교사를 도울 수 있는 것은 기도와 희생을 통해서입니다.”라고 자서전에서 말씀하십니다. 감탄할 만한 점은 선교적 열망이 그녀의 개인적 취향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가르멜수녀로의 부르심의 원의에서 나타납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같이 “나는 교회의 딸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자서전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을 온전히 껴안으려는 교황의 뜻을 알고서 교황의 원의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빌라 데레사 덕분에 소화데레사는 가르멜수녀로서 자신이 선교사가 되었음을 느낍니다. 소화데레사의 첫 영적 형제인 모리스 벨리에르 신학생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씁니다. “아시다시피 사도가 못 되는 가르멜회 수녀는 자기 소명의 목적에서 빗나간 것이고, 단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천 번이라도 목숨을 던지려고 하신 천사와 같은 성녀 데레사의 딸이 되는 자격을 잃고 맙니다.”(1896.10.21) 소화데레사 성녀는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 “활동으로 선교사가 될 수 없다면, 나는 어머니 데레사와 같이 사랑과 고통으로 선교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완벽한 예수의 데레사 정신과의 조화속에서 어린 리지외 가르멜 수녀는 선교를 위해 관상적 기도에 우선권을 둡니다. “기도의 힘은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순간에 왕앞에 자유롭게 다가갈 수 있는 여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좀더 그녀의 선교에 대한 열정을 살펴볼 수 있는 예가 있습니다. 1895년 사이곤 가르멜이 하노이에 수도원을 창립했습니다. 이 창립지와 리지외사이에 정기적인 왕래가 있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 곤자가는 지원자를 구했습니다. 소화데레사는 그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나는 잘 모르는 도시가운데 유배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더 많은 고통을 받는 것 - 나의 자매들을 위해 유배를 받아들입니다. 나의 어머니 : 외국 가르멜에서 살기 위해서는 매우 특별한 소명이 필요합니다. 많은 영혼들은 부르심을 느낍니다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소명을 가지고 있음을 당신이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자서전). 그녀의 영적 형제인 마우리체 룰랜드에게 그녀는 단호한 결심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기꺼이 톤킨으로 떠날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기로 섭리하신것이라면요” 그리고 가능한 다른 오해를 피하기 위해 그녀는 강조하여 다시 말합니다. “아니 그것은 꿈이 아닙니다. 나는 착하신 예수님이 천국 가르멜로 나를 곧 부르시지 않는다면, 나는 하노이 가르멜로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위중한 병 때문에 이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마지막 대화’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휴식하러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내가 하느님을 사랑한것처럼 그분을 사랑받게 하려는 나의 선교 사명이 막 시작됨을 느낍니다. 나의 천국은 세상 끝날까지 지상에서 쓰일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지상에서 선한 일을 하는데 나의 천국을 소비할 것입니다. 나는 모든 영혼을 구하는 그때까지 행복할 수 없고 쉴 수 없습니다.”
3. 역사적인 외적 요인, 하느님의 섭리 소화데레사가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되기 위해서는 그녀 자신의 공덕과는 별도록 적당한 시기에 하느님의 섭리하에 몇몇 사람들이 이에 간여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어떤 젊은 신학생은 에스키모인 복음화에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1900년 24살의 나이에 그는 카나다 사스카첸완 교황청관할지역을 위해 해외로 나갑니다. 그는 카누로 가리보우 호수를 건넙니다. 썰매를 몬지 7일 후에 그는 마침내 에스키모인들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 그들과 만나게 됩니다. 그곳은 복음화가 어렵습니다. 비관주의가 선교사들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오비드 카레보이스 주교는 P.터케틸에게 에스키모인들이 있는 케스터필드 인렛에 선교를 맡겼습니다. 그는 두명의 동료와 거기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1년동안 완전히 세상과 고립된채 눈과 얼음에 둘러싸여 살았습니다. 그는 사전이나 문법책 없이 언어를 배우려고 했습니다. 그는 원주민에게 직접 질문하고 듣고 지켜보면서 언어를 배우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주민 으로부터 조소와 야유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1913년 11월 이웃 지역에서 두명의 선교사가 순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마침내 카레보이스 주교는 장래가 없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 선교사업을 금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 유럽에서 리지외를 근거지로 삼는 배이웃스 노르만 교구로부터 우편물이 도착했습니다. 그 내용은 소화데레사의 짧은 생애에 대한 것과 성녀의 시신에서 발굴한 관으로부터 나온 조그만 자루들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을 도와주기로 약속한 노르만디 출신인 성녀. 그녀는 정말 그 약속을 지켰을까요 ? 터케틸은 순진하게 그 약속을 믿고서 다음날 아침 그가 에스키모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때 그는 성녀께 간구하면서 자기 동료 기라드 수사에게 에스키모 청중들에게 이 조그만 자루들을 열어보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날 지체없이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선교에 가장 적대적인 사람이었던 케스터필드의 무당은 세례를 요구하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나는 매일 여기에 올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지옥에 가길 원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나에게 말하는 모든 것을 할 것입니다.” 그의 회개는 많은 다른 에스키모인들을 세례받도록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노르만 사람 데레사가 그 기적을 일으켰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선교를 금지시키려던 카레보이스 주교는 다른 지역에서도 미션지구를 창설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포인테 아우스 에스키마우스에는 소화데레사를 기념하여 첫 성당이 지어졌습니다. 터케틸은 케스터필드에서 소화데레사 성녀의 병원을 개시했고 그 밖의 다른 시민들의 편의 시설을 세웠습니다. 평신도인 폴 리오넬 버나드씨는 소화데레사에 대해서 듣었을 때부터 소화데레사의 열렬한 추종자였습니다. 1910년에 그는 리지외 가르멜 수녀원과 정기적인 관계를 가졌으며 1957년에는 소화데레사의 부모의 시복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1917년 당시 그는 국가 대변인이었고 그는 베넥딕도 15세에게 경탄할 만한 사명을 수행하는 이 가르멜 수녀의 즉각적인 시복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교황에게 데레사의 시복을 위한 청원에 수천명의 서명이 적힌 12권의 노트를 제출하였습니다. 그후 카레보이스 주교와 버나드씨는 리지외의 성녀가 세계 모든 선교사들의 수호자가 되는데 계속해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선교교황이었던 비오 11세가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미션에 대한 그녀의 관심은 이미 그녀가 가르멜에 들어가기 전부터 보인것입니다. 그것은 성녀가 이탈리아의 여행에서부터의 결론 중 하나였습니다. “지상의 소금을 간직할 목적을 위해 있는 이 부르심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것은 가르멜로의 부르심이며, 우리의 기도와 희생의 유일한 목적은 말씀으로 그리고 모범으로 영혼들을 복음화시키는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하는 사도들의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자서전)” “수많은 영혼들, 우리는 그 영혼들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라는 말에서 소화 데레사의 선교사로서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선교의 수호자로서 그녀의 사후의 하는 선교인 것입니다. 그녀의 선교에 대한 모성적 훌륭한 본보기는 두명의 영적 형제와 나눈 편지들입니다. 이 편지에서 소화데레사는 자신이 위대한 누이로서, 가르침을 주는 누이로서, 중재하는 누이임을 보여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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