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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선, 기도, 단식..... - 방효익 신부님

도구 Ludovicus 2009. 2. 27. 09:00

오늘 제1 독서(요엘 2,12-18)는
하느님께로 돌아서지 않는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를
이민족의 침입으로 농사꾼들에게 끼쳐질 심각한 피해로 비교합니다.

북쪽 아시리아와 바빌론의 침공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주신 땅이 짓밟히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돌아서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시라서 분노에 더디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잘못을 보시고 재앙을 내리려고 하시다가도 후회하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기 위해 하느님께로 돌아올 때,
즉 회개할 때에 재앙을 내리신 것을 후회하시지만
당신께로 돌아서지 않는 이들에게는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과 화해할 때,
자신의 커다란 잘못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아픔을 고백할 때에는
항상 옷을 찢고,
자루 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면서 하느님께 간청했습니다(1열왕 21,27; 2열왕 19,1; 22,19; 34,27;
에스테르 4,1; 1마카 4,39; 11,71; 이사 37,1; 예레 41,5).
그러나
요엘 예언자는 거룩한 전례에 백성들을 모아놓고
회개의 표식으로
이제는 더 이상 옷을 찢을 것이 아니라
단식을 하고 마음을 찢으면서 하느님께 화해를 간청하라고 합니다.
이제껏 하느님을 잊고 살았던 것을 그만두고 하느님께로 돌아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할 만큼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들이 하던 일을 다 제켜놓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열중하라고 강조합니다.

오늘 제2 독서(2코린 5,20-6,2)는
교만과 분열의 극치를 달리는 코린토인들에게 먼저 하느님과 화해하라고 권고합니다.

대상은 다르지만 제1 독서와 똑같은 구조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은 물론 코린토의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사절,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책임을 맡은 이들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대변인이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를 대리하는지,
어떤 사명을 대리로 수행하는지,
그리고
대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와 화해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와 적대감을 가지고 살거나,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없이 살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절로 살아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께로 돌아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코린토인들은 모두 자기가 잘나서 이렇게 사는 줄 알고 있는데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 것이므로
이제껏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깨달음이 생기는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이므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일치하고 겸손해지라고 합니다.
즉 오늘이 우리 생애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겸손하게 그리스도께로 돌아서서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과 화해하라고 합니다.
하느님과의 화해는 죄의 고백과 더불어
다시는 하느님과 멀어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이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마태 6,1-6.16-18)은
유다인들의 신앙에 바탕을 둔
자선(1-4절), 기도(5-6), 그리고 단식(16-18)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토빗의 유명한 유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다면
자선을 베풀라고 했습니다(토빗 4,7.16).
이스라엘의 현자들은
기도와 자선은 늘 함께 하는 것으로 권고했습니다(집회 7,10; 35,4).
이사야 예언자는
참된 단식,
즉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이란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라고 반문합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렇게 자선을 베풀고, 기도하고, 단식을 하지만 하느님께로 돌아서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선을 베풀고,
기도하고,
단식을 할 때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위선자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감추고 자기에게 있지도 않은 것을 드러내면서
가증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은”(마태 23,37)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면서
서민들에게는 외적으로는 물론 내적으로도 완벽하게 지킬 것을 강요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제물을 많이 바치는 것이고,
계명에 충실한 것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은혜를 갚는 것이 고운 곡식 제물을 바치는 것이고,
자선을 베푸는 것이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것”(집회 35,1-4) 입니다.
유다인들에게 자선이란
하느님과의 계약에서 요구되는 형제애를 베푸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선을 베풀 때에는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진정한 자비의 마음으로,
그리고 떠벌리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듯이 은밀하게 하라고(마태 6,3) 가르치십니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남에게 알려지는 순간 이미 갚음을 다 받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기도 역시
남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지 말 것은 물론
거만하고 장황한 기도를 하지 말고
진심으로,
전례에 맞게, 그리고 겸손과 깊은 신앙으로 하라고 합니다.
특히 자기가 청하는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정말 합당한 청원인지 잘 알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거나
악한 행실을 고치지 않고서 하는 기도는
절대로 들어주시지 않는 분이십니다(이사 1,10-17).

유다인들에게 단식이란 애도의 표시였으며, 깊은 참회의 표현이었습니다.
성전이 황폐해졌음을 볼 때에 단식을 권했고,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이들이 많아질 때 옷을 찢고, 단식으로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가식적으로 단식을 하는 이들에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이사 58,3-5)라고 경고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는 행동을 반복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위 열심하다는 유다인들은
속죄의 날(레위 16,29-31)에 하는 단식 외에도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하는데
초췌한 모습을 더욱 드러내면서 마치 단식으로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고 여기고
다른 이들에게 자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것을 위선적인 행위라고 단정하신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을 맞아서
오늘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우리도 다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보기로 다짐해봅시다.
옷을 찢고,
자루 옷을 입거나 재를 뒤집어 쓴 것으로 회개했다고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어봅시다.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상처를 주님께 보여드리면서 치유를 청해봅시다.
그렇게 하려면
주님의 마음에 드는 단식이 필요할 것이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면서
우리의 결점들 가운데 하나라도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자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자선이란 오로지 물질적인 것을 베푸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부수적인 것이고,
자선에서 본질적인 것은 따뜻한 마음을 건네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생을 통하여, 따뜻한 마음을 건네줌으로써
이웃이 하느님께로 돌아서고,
하느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작은 보탬이 되는 일을 찾아보도록 노력합시다.

마음의 상처 때문에
하느님께 돌아서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고,
정상적으로 느껴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사랑으로 찾아가고,
끼니 걱정으로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면서
그분들이 우리와 함께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희생과 노력을 잘 알아주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립시다.
그러나 그분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와 우리 이웃들에게 풍성하게 내려질 수 있도록 기도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행실을 고쳐봅시다.

 

재의 수요일 강론 - 방효익 신부님

 

 


출처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글쓴이 : 구절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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