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가톨릭

[스크랩] 가톨릭교회의 특징-한국교회사

도구 Ludovicus 2009. 2. 18. 07:50

천주교가 전래되기 전의 조선
천주교가 이 땅에 전래되기 전의 조선 후기(18세기 말)는 극심한 당파 싸움으로 매우 불안한 시기였다. 또한 유교의 한 갈래라 볼 수 있는 성리학이 그 당시 조선 왕조의 정치·문화·사회 전반을 이끌어 가고 있었으나 그 내부적 모순으로 인하여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또한 양반·중인·상민의 계급 차별이 심하여 구조적 변화를 갈망하는 움직임과 요구들이 일어났고 기근과 전염병으로 사회 병폐의 악순환이 계속되어 성리학에 회의를 품는 학자들이 많아졌다. 이러한 시대적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대안을 모색하는 실학자들이 생겼는데 그 중의 일부는 천주교를 통해 그 답을 찾고자 했다. 당시 중국에 파견된 외교 사절단을 통하여 「천주실의」와 같은 천주교 교리서가 들어와 실학파와 남인계 학자들 사이에 널리 읽혔다. 처음에 천주학은 학문적 호기심으로 연구되었으나 천진암 주어사의 ‘강학회'를 통해 신앙적 실천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벽,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권철신, 권일신 등은 천주교에 대한 지식의 폭을 넓히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이승훈을 북경에 보냈다.

교회의 창설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많은 교리서와 성서 그리고 성물을 가지고 귀국한 후 이벽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영세 입교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서울의 명례방(현재 명동 성당 자리)에서 정기적 종교 집회를 마련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이것이 한국교회의 시작이다. 단 한 사람의 전교 신부도 찾아온 일이 없이 아시아의 한 왕국에 복음의 싹이 튼 것이다.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이고 신앙의 싹을 틔웠으며, 평신도가 주축이 되어 오랜 박해 동안에도 신앙을 증거하고 키워 온 자랑스런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최초의 박해와 주문모 신부의 입국
초기 신자들은 명례방에 있던 교우 김범우의 집에 모여 기도하며 집회를 열고 전교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이듬해 관헌에게 발각되어 일행이 잡혀가고 교회 서적·성물·성화를 압수당했다. 이때 김범우가 유배지에서 사망하여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의 신앙생활도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계속되는 박해에도 권철신, 정약종 등에 의해 교세는 나날이 확장되었다. 아직 성직자가 없었던 한국교회는 1786년에 북경교회를 본뜬 소위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만들어 2년 동안 주일 미사를 거행하고 세례·견진·고해성사를 베풀었다. 그러나 북경 주교에게 문의한 결과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자 1795년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모셔오게 되는데, 이는 조선 교우들이 벌인 피나는 성직자 영입 운동의 결실이다. 주문모 신부의 입국으로 신자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였으나 이에 위기를 느낀 조선 왕조의 탄압을 피할 수 없었다. 여회장 강완숙은 주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모진 박해와 시련을 겪었다. 그 와중에도 조선 천주교회의 전교는 계속되었다.

천주교 박해
천주교가 이 땅에서 박해를 받게 된 것은 유교의 신분제도와 천주교의 평등 사상이 빚어낸 갈등과, 천주교가 조상 제사를 거부함으로써 전통 질서와 가치관을 파괴한다는 우려를 낳았기 때문이다. 또 정치적으로는 당파 싸움에 천주교가 이용되었다. 김범우가 순교한 이후 주문모 신부의 입국으로 신자수가 1만 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그러던 중 순조가 즉위한 1801년 당파 싸움의 와중에 권철신, 정약종, 이승훈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 300여 명과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였다.(신유박해) 1836년 모방 신부, 1837년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의 입국으로 모처럼 활기를 되찾게 된 교회는 외국인 성직자가 입국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다시 모진 박해를 받았다. 1839년 정부는 ‘사학토치령’을 반포하고 세 명의 성직자와 정하상을 비롯한 신자 200여 명을 처형하였다.(기해박해) 철종 즉위 후 10여년 동안 박해가 뜸해지고 최양업 신부와 12명의 프랑스 신부의 노력으로 신자 수가 2만 3천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종이 즉위하자 흥선 대원군은 자신의 집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1866년에 대대적인 박해를 하였고, 이 박해로 9명의 성직자와 1만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병인박해)

신자들의 신심생활
한 번의 성사를 위해 평생을 모험 속에서 조선시대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단정하여 이를 뿌리째 뽑는 것이 나라의 정책이었으므로 천주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는 데는 죽음을 각오하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그러나 한국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믿음을 받아들였고 언제나 순교할 각오로 살았다. 신자들은 단 한 번의 성사(聖事)를 위해 평생 사제를 기다렸으며, 단 한 번의 미사 참례를 위해 수백 리 험한 산길을 걸어가 한밤중에야 비밀리에 미사 참례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박해가 심해지면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신자들끼리 따로 마을을 형성하여 살았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 재현
이러한 교우촌은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고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는 상태였지만 교우들끼리 서로 돕는 이웃 사랑이 흘러넘쳤다. 아침·저녁으로 함께 기도하고 같은 생업에 종사하며 서로 돕고 사는 모습이 마치 사도행전(2,44­47;4,32­37)에 나오는 초대교회 공동체를 연상케 했다. 한국 초대교회 신자들은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외국 선교사에게 교리를 배웠으며 구하기 힘든 한글 서적을 통하여 스스로 교리 공부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생명의 양식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으로 교리를 배웠다. 이런 노력은 그들이 처해 있던 무지조차도 극복하고 하느님 말씀의 진수를 깨닫는 지혜를 터득하게 해주었다. 그러기에 그들이 믿고 따르는 교리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진리, 즉 생명의 말씀이었다.

성령의 역사
200년 전 선교사 없이 이 땅에 복음이 전래되었다는 사실과, 1801년의 큰 박해 이후 성직자가 없던 30여년 동안 신자들이 숨어 살아야 했던 어려운 처지에서도 서로 도우며 이웃에게 말씀을 전하는 데 헌신하여 교우 수를 늘리고 교회를 지켜왔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기적에서 우리는 교회 안에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알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신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무명의 순교자들
순교 선열 중에 가장 뚜렷하게 떠오르는 인물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이다. 그는 가톨릭의 성인일 뿐만 아니라 일찍이 서양 문물을 배워 익힌 한국 최초의 유학생이기도 하다. 1846년 9월 16일, 한국의 수선탁덕(首先鐸德:한국인으로서 가장 먼저 신부가 됨) 김대건은 새남터 모래밭에서 망나니가 내려치는 칼날 아래 참수되었다. 서품받은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는 26세의 젊은 나이로 군문효수형을 받기 전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될 것이다”라고 소리 높여 자기의 믿음과 신념을 외쳤다. 우리에게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대회에서 성인으로 선포된 103위 순교자들이 있다. 그리고 수많은 무명의 순교자들이 있다. 바로 이들이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이룩해 놓은 것이다.
[PD 하느님 DJ 예수님] 중에서 -

출처 : ┗━ 영원에서 영원으로 ━┓
글쓴이 : 금낭화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