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활동이 회당에서 가정을 거쳐 넓은 세상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시는 이 기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가정 안에서‘장모’님이 차지하는 비중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될 듯싶다. 설 전에 내가 참으로 존경하는 박 아우구스티노 형제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1년 전에 갑자기 돌아가신 장모님은 집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의 시중을 드신 분이셨습니다. 좋은 유교적 집안의 맏며느리는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한다(奉祭祀接賓客)는 전통을 이어가는 분이죠. 종가(宗家)댁의 맏며느리로서 사위, 자식, 친척, 손님들 각자의 자리를 제대로 마련하여 마음 편안히 머무르도록 늘 배려해 주신 분이셔서 이분의 빈자리가 그렇게 커 보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열병으로 사경(死境)을 헤매는 시몬의 장모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31절). 그러자 부인은 예수님의 시중을 드셨다(마태 8,15).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도 많은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실 때(34절),
마치 장모님이 사랑하는 사위와 가족 친지들을 시중들듯이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이다! 안식일 저녁에도 밤늦도록 끊임없이 밀려드는 많은 병자들을 잠시도 쉬지 못한 채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따뜻하고 자상하게 고쳐주신다. 어떻게 예수님은 갖가지 질병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보듬어 안아주는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을 지니실 수 있을까?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35절). 기도 안에서 예수님은 하늘의 맑은 정신과 기운으로 당신을 채우시고 하루를 시작하신다. 예수님은 기도 안에서 늘 하느님 아버지(聖父)의 심오한 지혜와 권능, 자비심(慈悲心)으로 자신을 채우시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다.
“온전히 충만한 신성(神性)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콜로 2,9-10).”기도 안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깊은 일치를 이루시기에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나라가 되신다(루카 11,20; 17,20-21).
여기서 우리는 기도와 활동, 관상과 선교는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야 함을 보게 된다. “내 말을 믿어 주십시오. 마르타와 마리아는 나란히 같이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을 잘 모시고 항상 당신 곁에 있을 수 있습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기도하시던 외딴곳에서 갑자기‘온 갈릴래아’로 예수님의 활동무대가 바뀌고, 이분께서는 무척이나 서두르시고 바빠지셨다(38절).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하고 바오로 사도는 말하지 않았던가? 초기 조선 천주교회를 창립하신 신앙의 선조들이‘말씀을 선포한다’는 일념으로 분주하게 움직이시던 모습 또한 이와 같지 않았을까?
“… 계묘, 갑진 년 간 부터 연소배 중에서 재기 있는 자들이 천학이라는 학설을 가르쳐 인도하였는데, 마치 상제가 친히 내려와서 사명을 띤 사람에게 가르쳐 알림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 (安鼎福, 順菴集, 「…自癸卯甲辰年間少輩之有才氣者唱爲天學之說有若上帝親降而詔使者然…」)”
ㅡ구요비 신부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