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선교 자료실

[스크랩] 교회론23. 가톨릭교회의 선교

도구 Ludovicus 2009. 2. 1. 21:18
교회론23. 가톨릭교회의 선교 1
1. 2000년 선교역사 . 가톨릭교회는 유대교로부터 독립하여 빠른 시간에 로마제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교회의 강력한 선교활동으로 전체유럽이 순식간에 가톨릭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선교는 세 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로마화의 단계, 둘째, 유럽화의 단계, 셋째, 세계화의 단계입니다. 1) 로마화의 단계 교회초기 300년 동안은 로마제국의 혹독한 박해, 이교도들의 공격과 유대인들의 질시 속에서도 교회는 선교에 온 힘을 다했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신자들의 놀라운 신앙이 그 힘이었습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가톨릭교회의 자유를 선포했을 때 교회는 이미 로마 제국 안에서 무시할 수 없는 공동체로 성장하였습니다. 380년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가톨릭은 로마제국의 중심종교가 되었습니다. 2) 유럽화의 단계 476년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게르만민족이 유럽전역을 지배하면서 여러 왕국을 세웠지만 결국 프랑크 왕국이 서유럽을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프랑크왕국은 가톨릭신앙을 받아들였는데 국가의 국시를 '가톨릭교회의 보호'로 정할 정도로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황제는 주교를 지방의 왕으로 임명했고, 주교는 한편으로는 왕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주교로서 그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북아프리카에만 300개 교구가 있을 정도로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일대에 가톨릭교회는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하지만 마호메트(570-632)가 이슬람을 창시한 이후 이슬람세력은 유럽의 가톨릭과 치열한 각축전을 펴게 됩니다. 1000년 말부터 1200년 말까지 계속된 십자군전쟁을 치루었고 그 후에도 이슬람세력은 유럽을 끊임없이 공략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가톨릭과 이슬람은 원수지간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3) 세계화의 단계 140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톨릭은 세계로 진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해양강국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서로 다투어 해외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한편 가톨릭신앙을 전파하였습니다. 당시 미국은 인디언 원주민들이 살았던 곳으로 문명이 열악했었고, 상당한 문명을 이루고 있던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일대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면서 가톨릭이 전파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지의 잉카와 마야 문명을 파괴하고 강제로 가톨릭신앙을 전파했던 당시의 식민지식 선교는 오늘날 반성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세계선교는 주로 수도회가 큰 역할을 하였는데, 1534년에 설립된 예수회가 아마도 가장 큰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예수회는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으로 당시로서는 미지의 세계였던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으로 거침없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또한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도 지대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1653년에 주로 아시아지역 선교를 목적으로 프랑스에서 창립된 '파리외방전교회'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지역 선교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세계선교는 많은 순교자들을 낳으면서도 유럽에 선교열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복음을 전하겠다는 신념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선교대열에 뛰어 들었고 유럽교회전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선교를 지원하였던 것입니다.
2. 중남미선교 . 1400년대 중반 이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세계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탐험가와 모험가들이 미지의 세계로 진출하여 부와 명예를 얻고자 했습니다. 왕실은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이들을 지원해주었습니다. 포르투갈은 남쪽으로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항해를 계속하여 드디어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에 도착하였고, 항해를 계속하여 인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아프리카와 동인도, 브라질 등등 도처에 포르투갈 식민지가 건설되었습니다. 마젤란은 포르투갈 국기를 달고 1519-1522년에 최초로 세계일주 항해를 성공하였습니다. 1516년, 중국에 최초로 도착한 포르투갈 상인들은 1567년, 마카오에 거점을 설치하였고 1542-1543년에는 일본에까지 도착하였습니다. 일본은 해상무역을 통해 빠르게 국력을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세계정세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페인도 포르투갈 못지않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컬럼부스는 1492년 아메리카를 발견하였는데 중남미의 섬들을 인도인줄 착각하고 서인도로 명명하였습니다. 페르난도 코르테스는 1519-1521년 멕시코를 정복하였습니다. 1520년에는 칠레가, 1525년에는 아르헨티나가, 1532년에는 페루가 정복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진출은 종교적 열망을 자극시켰습니다. 당시 난폭한 정복자들도 정복지민족들에게 가톨릭신앙을 전파하는 것을 거룩한 의무로 느꼈습니다. 그들은 정복과 동시에 토속종교를 금지시키고, 가톨릭신앙을 강제로 부여하였습니다. 그들은 늘 선교사들을 대동하였습니다. 당시의 선교는 ‘식민지마인드’와 불가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럽중심의 우월의식과 정복적인 선교정책은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선교방법도 무자비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원주민들은 어둠의 자녀들이고 그들의 고유한 삶의 방식은 선교사들이 보기에 미개하고 무지몽매한 것이어서 선교사들은 정복과 동시에 모든 종교와 문화를 파괴하고 가톨릭신앙을 강제로 이식하는 것을 거룩한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그 뿌리에 유럽중심적 사고방식과 문화적 우월의식, 그리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회중심적 사고가 있었습니다.
3. 인도와 중국선교 . 1534년에 창설된 예수회는 기존의 식민지마인드에서 탈피하여 선교에 새로운 마인드로 접근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예수회는 현지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인정하는 선교를 도입하였던 것입니다. 예수회창설자중의 한사람이었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는 1541년, 유럽을 떠나 인도에 도착하여 8년 동안 선교에 성공을 거두고 1549년 일본에 도착하였습니다. 이후 2년 4개월 동안 3천여 명의 신자를 얻게 되었고, 1552년, 당시 대국이었던 중국으로 향했지만 홍콩 근처의 섬 상천도에서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후에 교회사가들은 그를 동방의 사도로 불렀습니다. 로베르트 데 노빌리(1577-1656)는 선교방법에 있어서 당시 원주민의 종교와 문화를 금지하던 사고를 버리고 현지에 적응하는 ‘적응주의’를 주창하여 원주민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에 적응하는 방법을 도입하였습니다. 데 노빌리는 인도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모든 관습을 허용했고 인도의 토속종교에 대해 관용으로 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인도에서 가톨릭은 빠르게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마태오 릿치(1552-1610)는 적응주의를 중국에 적용시켜 비상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581년, 마태오 릿치는 인도의 고아로부터 마카오를 거쳐 1690년 마침내 북경에 도착하였습니다. 마태오 릿치는 명황제의 허락을 얻어 1601년에 북경에 성당을 짓고 선교를 시작하여 1610년에 2천5백여명의 신자를 얻었습니다. 마태오 릿치는 서양의 신문화를 황제에게 전하면서 황제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마태오 릿치는 천문학자요 수학자로 북경의 궁중에서 환대를 받으며 생활하였고, 황제의 친구요 조언자로 활동하면서 선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주실의(天主實義)’ 등 열아홉 건의 교리서 및 서양소개서를 저술하여 국가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교회의 발전을 꾀했습니다. 이 천주실의는 훗날 조선에 전해져 선교에 결정적 역할을 한 교회서적이 되었습니다. 아담 샬(1592-1666)은 북경의 고위관리에까지 오르면서 선교에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650년 북경에 성당을 세웠고, 1657년 중국에서 종교자유를 얻었습니다. 그의 사망 시에 27만 명의 가톨릭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예수회 선교사들은 현지인들이 언제나 경건하게 살아왔고, 여러 신들을 경배해왔음을 인정하여 그들 고유의 문화와 신인식을 존중했습니다. 그리하여 유교의 상제(上帝)개념을 하느님개념으로 환원시켰습니다. 또 조상숭배인 제사나 여러 의식들도 전통으로 존중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모든 신인식은 가톨릭신앙에서 완성될 수 있음을 제시하여 거부감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630년대부터 중국에서 활동하던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의 선교사들은 예수회의 적응주의를 지나친 것으로 생각하고 마태오 릿치와 예수회 선교사들을 로마 교황청에 고소하였습니다. 이에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1645년 적응주의를 금지시켰습니다. 적응주의 금지는 선교지역에서 수도회간의 경쟁을 유발시켰고 대립을 격화시켰습니다. 그 후 1704년, 교황 끌레멘스 11세는 적응주의 금지를 다시 재확인하였습니다. 1707년, 중국에 파견된 교황특사는 황실에 대해 고자세로 적응주의를 경고하였고, 이에 황제는 격노하였습니다. 교황특사는 억압되었다가 사망하였습니다. 1742년, 교황 베네딕도 14세는 다시 모든 적응주의를 근본적으로 금지시켰습니다. 이렇게 하여 중국에서 박해가 시작되었고 중국의 선교는 점차 꺾이고 말았습니다. 1939년, 교황 비오11세와 1940년 비오12세가 마침내 중국 가톨릭에 대한 적응주의 금지령을 철회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혹독한 박해로 중국 가톨릭은 이미 명맥을 잃었고 거기에다가 공산당의 등극 이후 교회는 지하세계로 숨어들고 말았습니다.
4. 일본선교 . 1549-1552년 일본에 복음을 전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떠난 후 일본에서는 그의 후계자들인 도레와 페르디난데스 두 신부의 활약으로 가톨릭교회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1605년경에는 도꾸가와 이에야스 치하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자수가 75만으로 불었습니다. 1592년부터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종군신부로 파견된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에서 1년간 활동하였는데, 주로 일본군주둔지에서 군인들을 대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포로로 일본에 붙잡혀가게 되었고 일본에서 일부 조선인들은 가톨릭을 신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막부시대를 열면서 가톨릭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도꾸가와는 가톨릭을 방치할 경우 정권에 심각한 도전세력이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의 민족의식은 칼의 문화로 철저한 복종이 무엇보다도 사회의 근본토대였습니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는 집요하고 철저하고 처절하였습니다. 1868년, 명치유신으로 막부시대가 끝날 때까지 일본의 막부는 가톨릭 말살정책을 취했습니다. 일본의 가톨릭교회 박해의 4가지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1) 성화밟기: 매년 1월 6일, 전 주민이 그 고을의 통치자 앞에 일렬로 서서 십자가와 성화를 밟고 지나가는 행사를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밟아야했던 숨은 신자들은 집에 와서 발을 씻고 보속하는 마음으로 그 물을 마셨다고 합니다. 2) 오가작통: 다섯 집씩 묶어서 가톨릭을 신봉하는지 감시하게 하였는데, 한집이라도 가톨릭을 믿으면 다섯 집을 몰살시켰습니다. 3) 밀고자 포상: 밀고자에게는 평생 먹고살 만큼의 포상을 하였습니다. 신부와 평신도회장, 평신도 등 차등을 두어 포상금을 주었습니다. 4) 불교의 국교화: 모든 주민은 불교식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태어나면 절에 등록하고, 절에서 결혼하고, 장례도 절에서 해야 했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지하로 숨어들었고 숱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순교자가 배출되었고, 그 기간도 길었습니다. 숨어 지내던 신자들은 후손들에게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앞으로 7대를 기다리면 사제가 온다. 그때 세 가지를 물어봐라. 1. 교황님이 파견하셨는지. 2. 독신이신지. 3.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지.' 점차 신자들은 신부 없이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 기간이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정통교리에서 벗어나게 되어 비밀종교인 밀교의 형태를 띠게 되었고, 성모마리아를 하느님처럼 받들게 되는 등 정통교리에서 이탈하게 되었습니다. 명치유신으로 일본이 근대화의 길을 걸으면서 가톨릭신부가 다시 오게 되어 흩어진 신자들을 찾았는데, 일부는 돌아오게 되었지만 일부는 신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오늘도 규모는 작지만 독자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은신자(隱信者)라고 하고, 이들이 신봉하는 신을 납호신(納戶神)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가톨릭에서 이탈하여 불교와 토속종교와 혼합된 신흥종교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의 가톨릭신자들은 명치유신부터 다시 선교한 신자들이라고 볼 수 있고 숫자는 50만 명 내외로 추산됩니다. -대구 대교구 교구청 사목기획실장 전광진 (엘마노) 신부

 

출처 : 직암선교회
글쓴이 : rosenduft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