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황사영의 생애
황사영(알렉산델) 1775-1801
자는 덕소. 본관은 창원. 다른 이름으로는 황시복.
세례명은 알렉시오. 1775년 황석범과 이윤혜 사이에서 유복자로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부 황재정, 증조부 황준, 외조부 이동운 등의
남인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레 주자학을 공부하였고,
1790(정조 14년)년 16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에 정조는 그를 불러 손목을 잡으며 “네가 20세가 되거든
나를 만나러 오너라. 어떻게 해서든지 네게 일을 시키고 싶다.”고
하며 격려했다.
그해 그는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현의 딸과 혼인하였고,
처숙인 정약종의 영향으로 혼인 후 바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알렉시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돈독히 하면서 전교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791년 그는 이승훈에게 서학서를 얻어 보거나
유항검 등과 함께 서학을 토론하였고, 최해두, 홍익만등과
왕래하였으며, 조섭등과 한자리에서 서학을 강습하기도 하였다.
또한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부터 주 신부를 봉행하면서
명도회의 주요회원으로서 활발한 선교,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희생되었는데, 정약종 등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황사영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졌는데 이에 그는 서울을
빠져나와 수염을 깎고 충청도 제천의 배론으로 숨어들게 된다.
(황사영이 숨어서 백서를 쓰던 토굴)
황사영은 배론의 토굴에 숨어 살면서,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 등을 기록하던 중
주문모 신부의 처형소식을 듣고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가느다란 모필로 명주천에 적게 되었는데
옷속에 이 비밀 문서를 지니고 가던 옥 천희가 붙잡힘으로써
황사영은 체포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바로 황사영 백서사건이다.
이 백서사건은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그는 나라를 팔아먹으려 했다는 죄명으로 1801년 11월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 되었다.
(황 사영 순교 현양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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