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히브리 9,2-3.11-14
형제 여러분, 2 첫째 성막이 세워져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제사 빵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을 ‘성소’라고 합니다. 3 둘째 휘장 뒤에는 ‘지성소’라고 하는 성막이 있었습니다.
11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13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14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 마르 3,20-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20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저는 특별히 바쁜 일이 없으면 일주일에 한번은 부모님이 사시는 아파트에 갑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파트 입구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서, 관리원이 출입하는 차량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부 차량이 들어올 때면 “어디 가세요?”라고 항상 묻습니다. 그러면 아파트 동과 호수를 불러주어야 통과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아파트 입구에서 “어디 가세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글쎄 부모님 사시는 아파트의 동과 호수가 어떻게 되는지 도대체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백 몇 동인데……. 그리고 호수는 어떻게 되지? 13층 맨 왼쪽이니까 1301호인가?’
결국 ‘잠깐만요.’ 라고 말한 뒤에 수첩을 보고서야 제대로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부모님 집이라고 해서 저절로 아파트의 동과 호수를 기억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부모님 집이라도 자주 가지 않으면 아파트 동과 호수를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와 잘 아는 사이라는 이유, 나와 가깝다는 이유 등을 내세워서 “나는 그 사람을 너무나 잘 알아. 그 사람은 이러저러한 사람이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아무리 자주 만나고 가까이 산다고 할지라도 내가 아닌 남이기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행동하면서 섣부르게 판단합니다. 그 결과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아픔과 상처를 전달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과 가까운 친척 관계에 있는 일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친척이라는 가까운 관계이기에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고, 지금의 행동으로 보아 분명히 미쳤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서는데, 이는 아마도 가문의 명예를 염려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판단만을 내세우다보니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수 없었고 심지어 하느님 아들의 행동을 미친 행동으로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과 가깝다면 가까울 수 있는 친척이라는 점에서 우리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반대자는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반대자가 되어 예수님의 행동에 먹칠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예수님 믿은 지 오래되었다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입장대로 판단하고 행동하지요. 죄를 지으면서도 “이 정도는 괜찮아.”하면서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그러면 안 되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하면서 엄격한 잣대를 내세웁니다.
혹시 지금 내 자신이 예수님의 반대자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의 뜻에 먹칠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내가 어렵게 배운 것 가운데 하나는 용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계속 바쁘게 움직이며 낙관적인 삶의 태도를 가질 때 자신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다.(루실 볼)
19세입니다(‘행복한 동행’ 중에서)
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여배우 사르 베르나르의 일화다.
연극 ‘잔다르크’의 주연을 맡은 그녀가 연습을 끝내고 관객 앞에 선 첫날이었다. 2막의 법정 장면. 잔다르크로 분한 사르 베르나르가 피고석에 섰고 재판관이 심문을 시작했다.
“피고는 몇 살인가?”
흔들림 없는 눈빛의 잔다르크가 나직히 대답했다.
“19세입니다.”
그때였다. 그녀가 이 대사를 내뱉자, 객석에서 일제히 박수가 쏟아졌다. 극본상 크게 의미 있는 장면이나 대사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자 베르나르는 객석을 돌아보며 살며시 머리를 숙여 화답했다.
이 난데없는 박수와 여배우의 몸짓은 사르 베르나르의 당시 나이를 알면 이해가 된다. 여전사의 모습으로 무대에 선 그녀의 나이는 68세였다. 관객들은 칠순을 앞둔 노배우가 여전히 무대를 떠나지 않고 열연하는 것에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19세의 젊은 여인 역을 맡을 수 있었던 그녀의 자신감에도 열렬한 지지를 보내 주었다. 꺼지지 않는 열정을 간직한 베르나르에게 용기와 도전의 상징인 잔다르크 역은 적격이었다.
무엇이든 자신감으로 설득하라. 열의에 가득 찬 모습을 보여 주는 것보다 더 좋은 설득은 없다. 자신을 불태우는 열의는 상대에게 그대로 전달돼 동조와 지지를 끌어내는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