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2009년 1월 21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도구 Ludovicus 2009. 1. 21. 07:10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9년 1월 21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히브리 7,1-3.15-17

형제 여러분, 1 멜키체덱은 “살렘 임금”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로서, “여러 임금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그에게 축복하였습니다.” 2 그리고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먼저 그의 이름은 ‘정의의 임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또한 살렘의 임금 곧 평화의 임금이었습니다. 3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이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닮아, 언제까지나 사제로 남아 있습니다.
15 멜키체덱과 닮은 다른 사제께서 나오시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16 그분께서는 육적인 혈통과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 17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하고 성경에서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마르 3,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4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5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6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우리들은 성급하고 조급한 과속 문화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도 천천히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종합병원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릴 때 오히려 병이 생길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린다는 것이지요. 또한 기차나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줄을 설 때, 마트에서 계산을 위해 줄을 설 때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고해성사를 볼 때도 그렇지요.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온통 대역죄인만 있는지 고해소에만 들어가면 나오지 않습니다. 운전할 때 차가 막히면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아니 저 사람들은 집이나 지키지 왜 이렇게 다들 나와서 교통 상황을 나쁘게 하는 거야?’

이처럼 조금을 기다리지 못해서 불평을 던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즉, 과속 문화에 젖어 있다 보니 앞만 바라볼 뿐, 옆에 위치한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시간에 쫓기면서 현재 자신의 삶을 맑은 눈으로 지켜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습관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즉, 남의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자기 말만을 내세우려고 합니다. 또한 이러한 습관은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사랑을 버리지 못하게 합니다. 사실 내가 지금 지니고 있는 것은 죽어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만 잠시 맡아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평생 지니고 있을 것처럼 결코 다른 이에게 나누지 못합니다.

남보다 앞서려는 마음, 남보다 많이 가지려는 마음 등이 우리의 삶을 더욱 더 초라하게 만듭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확실히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치료행위를 하면 곧바로 고발하려고 하지요. 그런데 그 모습이 보기 좋습니까? 남의 조그만 꼬투리를 잡아서 옰아 매려는 그 모습이 얼마나 쫀쫀하게 보입니까? 그들의 모습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으로 분명하게 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런데 그들은 이 예수님 말씀이 맞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면서도, 어떻게 없앨까를 모의할 정도로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지 못합니다. 바로 예수님보다 앞서려는 마음, 예수님보다 더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으려는 욕심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더욱 더 오그라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 역시 치유되길 바라며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즉,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손을 뻗어서 정상인이 되었던 것처럼, 마음이 오그라든 이 사람들도 마음을 뻗어서 주님을 찬미 찬양하는 정상인이 되길 바라시지 않았을까요?

지금 내 마음은 어떨까요? 과속 문화에 흠뻑 젖어서 마음이 심하게 오그라든 것은 아닐 지요?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내 마음 깊숙하게 받아들여서 오그라든 마음을 뻗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상인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화살은 결코 돌에 꽂히지 않으며 때로는 그것을 쏜 사람에게 도로 튀어 간다.(제롬)



사자를 만나거든 100미터만 달려라(최용우)

옛날 초등학교 운동장에 사자 동상이 있었는데, 올라가 타고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이빨은 이미 부러져 버렸고, 누군가가 눈에는 크레파스로 안경을 그려 놓았고 칠이 벗겨져 마치 털갈이를 하는 것처럼 지저분한 사자!

그러다가 동물원에 가서 진짜 사자를 본 순간! 저는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습니다.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진짜 사자는 몸집부터가 거의 2m에 가까웠고, 뭐든 그 발에 한번 걸리면 갈기갈기 찢길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학교에 있는 사자 동상은 뭘 보고 그렇게 작고 조잡하게 만든 것인지 속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사자는 몸집이 크고 기운이 세어 '백수(百獸)의 왕'으로 불려집니다. 사자에게 한번 걸리면 그냥 그것으로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합니다. 그런데, 작고 연약한 '누'(염소처럼 생긴 동물)는 사자의 눈앞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고 있습니다. 사자가 슬금슬금 움직이면 '누'도 역시 사자와의 거리를 두고 물러납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사자가 총알같이 달려들면 '누'도 총알처럼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광활한 광야를 사자와 '누'가 필사적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달리기를 해서는 사자가 '누'를 잡을 수 없습니다. 사자가 힘껏 달릴 수 있는 거리는 90m 남짓이며 더 이상 뛰면 심장이 터져버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누'가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는 거리는 100m 정도이고 더 이상 뛰면 지쳐 쓰러져버립니다.

힘있는 사자는 90m를 뛰고 10m를 더 뛸 수 있는 사자입니다. 사자에게 잡혀 먹히지 않는 방법은 100m를 달리고 1-2미터 더 달릴 수 있는 힘만 있으면 됩니다.

여러분! 요즘 나라 안팎으로 다들 힘들다고 아우성이네요.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딱 10m만 더 뛸 수 있는 힘을 낸다면 어려움을 잡을 수 있어요. 1-2m만 더 뛸 수 있는 힘을 낸다면 우리는 살 수 있어요.
출처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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