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마르코 6,33-44
그때에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35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36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37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40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41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42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43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44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

몇 년 전, 어떤 교육 때문에 한동안 전철을 타고서 서울을 매일 오고갔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올라갔다가 다시 인천으로 내려올 때이면 항상 만나는 분이 계셨지요. 그분은 몸이 많이 편찮으신 듯 힘들게 이동하시면서 전철 승객들에게 도움을 청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저는 그 시간이면 항상 만나는 그분에게 매일 천 원씩을 드렸지요. 그분에게 이 돈이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만약에 드리지 않고 외면하면 내 마음이 더 안 좋을 것 같아서 매일 만날 때마다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일주일쯤 지났을까요? 일주일 내내 그분을 만났는데, 똑같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그분을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듯 한 느낌이 들면서 오히려 불안한 것입니다. 그때 저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제가 더 많은 것을 얻고 있다는 것을……. 그분은 제게 행복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면서 봉사와 나눔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봉사와 나눔을 세상의 논리로만 판단하려고 하지요. 즉, 내게 있어서 남는 것, 여분의 것만이 베풀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봉사와 나눔을 해서 잃는 것이 많다고 생각을 하게 되고, 왜 이렇게 손해 보는 짓을 할까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봉사와 나눔은 이렇게 나에게 남는 물건이나 시간을 다른 이를 위해서 단순히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은총이 내려지는 통로가 바로 봉사와 나눔 안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세상에서 얻는 것과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이 차원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하는 봉사와 나눔에 대해 모두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때로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을 많이 만납니다. 특히 협조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또 냉담하면서 문도 열어 주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또한 악의를 품은 말을 건네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내가 왜 이 짓거리를 하느냐고, 성당에서 봉사하는 것이 할 일 없어서 그런 줄 아느냐고 자신도 할 일 많은 사람이라고 큰 소리 치지요.
그런데 정말로 얻는 것이 없을까요? 세상이 나를 몰라줘도 또 본당 신부가 그리고 본당 수녀가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께서는 알아주십니다.
이렇게 세상의 논리를 내세워서는 진정한 봉사와 나눔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논리를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하느님 은총의 크기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즉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정말로 대단하지요? 예수님만 계시면 굶어죽을 일도 없고, 아니 먹는 걱정을 굳이 하면서 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기적에서 잊어버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이것이지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은 바로 우리들의 나눔과 봉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예수님의 기적이 나에게 저절로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기적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큰 기쁨이며, 큰 행복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쁨과 행복이 바로 나의 나눔과 봉사로터 시작된다고 하는데, 그 나눔과 봉사를 세상의 논리를 내세워 거부하겠습니까?
미래는 꿈의 아름다움을 믿는 사람들의 것이다.(엘리노어 루즈벨트)
마지막 기회(김원숙, ‘좋은생각’ 중에서)
며칠 전부터 오빠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홀로 칠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엄마. 그런 엄마와 싸우는 오빠에게 대들다가 나는 뺨을 맞아 오른쪽 청각을 잃었다. 결국 나는 오빠에게 등을 돌렸고 남편 따라 미국에 온 뒤로는 남이 됐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오빠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가 가는 동안에도 별 생각이 다 스쳤다. 이내 힘없는 오빠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해서 오빠는 말을 잘 잇지 못했다. 어색한 대화가 오간 뒤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오빠가 말했다. “지금까지 너한테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다. 부디 용서해다오.” 순간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나도 잘한 것 없어요. 오빠... 목소리가 안 좋은데 건강 잘 챙기세요.” 나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허탈했다. 40여 년 만에 듣는 오빠의 사과가 내 마음의 상처를 다 치유할 수는 없었다. 전화한 것을 후회하는 한편 약해진 오빠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며칠 뒤 올케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고마워요. 고모한테 전화 받은 다음 날 오빠 편안하게 가셨어요. 위암으로 고생하셨거든요. 오빠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늘 고모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했는데...”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 짧은 대화가 지상에서 오빠와 화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니, 내가 조금만 노력했더라면 얼마든지 한쪽 귀로도 오빠의 진심을 들을 수 있었을텐데... 후회로 가슴이 미어졌다. 이미 끊어진 수화기에 대고 나는 울며 말했다.
“오빠 정말 미안해. 나도 용서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