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2008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도구 Ludovicus 2008. 11. 20. 07:11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8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제1독서 요한 묵시록 5,1-10

1 나 요한은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 안팎으로 글이 적힌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일곱 번 봉인된 것이었습니다.
2 나는 또 큰 능력을 지닌 천사 하나가 큰 소리로, “이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자 누구인가?” 하고 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3 그러나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4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보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된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5 그런데 원로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라. 보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6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7 그 어린양이 나오시어,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셨습니다. 8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받으시자,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가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수금과, 또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들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께서 살해되시고, 또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10 주님께서는 그들이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들이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복음 루카 19,41-44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어제 아침 어디선가 오징어 굽는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리저리 둘러봐도 그 냄새의 진원지를 찾을 수가 없었지요. ‘이상하다’라는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는데 잠시 뒤, 아주 우연히 그 진원지를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냄새의 진원지는 바로 저한테 있었습니다. 그것도 오른손에……. 아마 아침에 라면을 하나 끓여 먹었는데, 라면 잘 익으라고 휘휘 저을 때 전자레인지 불에 털이 끄슬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 왼손에 나 있는 털은 꽤 많은데 반해서, 오른손에 나 있는 털은 사라져 있지요.

털이 타고 있는 지도 깨닫지 못했던 우둔한 저였지요. 그리고 그 오징어 냄새의 원인이 바로 저한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나는 것이냐고 찾고 있었던 어리석은 저였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의 삶 안에서 이렇게 우둔하고 어리석은 모습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내 자신이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만을 바라보고 단죄를 서슴지 않았을 때가 꽤 많았습니다. 또한 내가 바뀌는 것이 먼저인데도 다른 사람의 변화만을 먼저 요구했던 우리였습니다. 그리고 자신한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남한테는 너무나도 엄격했던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바로 이러한 자세에서 주님을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천 년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 모습을 통해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들일 리가 없고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큰 죄인일 따름이었습니다.

이렇게 부족하고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인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그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가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 우십니다. 그 화려한 성전이 무너져 버린다는 생각보다는, 이 성전 안에서 희생될 사람들의 아픔을 보셨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이스라엘은 로마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저항을 하다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맙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계신 집인 성전인 만큼 이 안에서 패배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패배하여 성전은 무너졌고 사람들도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죽어 없어질 삶인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헛된 것만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이제는 환하게 웃는 예수님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짓고 그럼으로 인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과 정반대로 가는 부족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주님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때,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원한 행복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짓는 죄, 나도 모르게 상처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겸손해지도록 합시다.



행동하는 결심을 하라(임헌우, ‘상상력에 엔진을 달아라’ 중에서)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라는 책 읽어 보셨나요? 변화 관리 분야의 전문가인 팻 맥라건이 쓴 책입니다. 알고 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우리의 작심삼일 근성을 잘 꼬집고 있습니다.

영어의 ‘결심하다(decide)'란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de는 ‘~로부터 잘라 내다’란 뜻이 됩니다.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잘라 내고, 오직 마음속에 품은 하나의 ‘결심’에 모든 중력을 집중시킨다, 이런 결심이 아니라면 진정한 ‘결심’이 아니라는 의미겠지요.

우린 너무나 많은 ‘결심’들을 남용하며 살아왔습니다. 다른 선택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겨 놓은 채 말로만 ‘결심’을 얘기해 왔습니다. 새해가 되면 통과의례 치르듯 무엇인가 ‘결심’을 하고, 진행 중인 일이 실패했을 때도 또 한 번의 ‘결심’을 하고, 누군가에게 충고 받았을 때도 ‘결심’을 합니다. 이렇게 해 온 수많은 ‘결심’ 실행으로 옮겨졌다면 당신은 이미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쉽게 한 결심은 쉽게 풀어지기 마련입니다. “눈물을 흘리지 말고, 눈물을 기억하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다음에 똑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같은 이유로 두 번 다시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철저히 준비하는 사람이 바로 ‘눈물을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결심은 모름지기 ‘칼’과 같아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어설픈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내가 유지해 온 ‘어정쩡한 습관’들을 아프게 도려내는 과정입니다.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하고, 친구도 만나야 되고, 영화도 봐야 되고, 개인 홈페이지도 관리해야 하고... 나의 작은 욕심들은 버리지 못하면서 ‘결심’만 한다면, 그것은 모래성을 쌓는 일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같은 이유로 또 한 번 울게 되는 뻔한 결과를 가져오겠죠.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 바로 지금 진정한 ‘결심’을 해야 합니다. 다른 선택의 가능성들을 과감하게 잘라 버려야 합니다. 말로만 하는 결심이 아닌, 행동으로 그 결심을 보여주세요. 진정으로 결심한다면, 우리가 하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출처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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