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오는 28일 저녁 로마 성바오로대성전에 특별한 등(燈)이 켜진다. 특별 희년 '바오로의 해'가 시작됐음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등불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날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대축일 전야 기도회에서 등불을 밝힌 후 1년 동안 사도 바오로의 삶과 정신을 기릴 것을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당부할 예정이다.
교황은 지난해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이방인의 사도' 성 바오로 탄생 2000주년을 맞이하며 2008년 6월 28일부터 1년간을 바오로 사도를 위한 특별 희년으로 선포한다고 밝힌 바 있다.
1. 왜 바오로의 해인가
구약 편에 모세가 있다면, 신약 편에는 바오로가 있다고 해도 될 만큼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인물이다. 어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사의 영봉(靈峯), 모세와 바오로 두 인물을 그 양 옆에 있는 준봉(峻峯)에 비유한다.

▲ 가톨릭교회는 앞으로 1년 동안 사도 바오로의 삶과 모범을 따르는 특별 희년 '바오로의 해'를 지낸다.
사진은 로마 성바오로대성전 뜰에 세워진 사도 바오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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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사전례에서 그가 쓴 서간을 자주 접한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등 신약 27권 가운데 무려 13권을 그가 직접 쓰거나 그의 제자들이 기록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의 핵심개념이 그에게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교회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쉽게 이해하려면 2000여 년 전 예루살렘 유다인 사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아들' 운운하며 율법과 유다 전통을 흔드는 위험인물 나자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야 안심했다. 하지만 예수의 죽음으로 소란이 끝나는가했더니 예수 부활을 믿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유다인들은 다시 긴장했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옹호하는 스테파노를 성 밖으로 끌어내 돌로 쳐 죽였다. 그 광경에 놀란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유다교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나자렛 예수의 파당, 또는 유다교를 분열시키는 기존 파당들의 한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사울(바오로의 이전 이름)은 이때 등장한다. 흠잡을 데 없는 바리사이 유다인이었던 그는 예수의 추종자들, 즉 이스라엘 이탈자들을 보고 격분했다. 그래서 그들을 붙잡아 들이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
바오로의 저 유명한 회심 사건은 바로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기 위해"(사도 9,2)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에 일어난다.
그는 다마스쿠스로 말을 달리던 중 번개 같은 '하늘의 빛'에 쐬어 말에서 떨어졌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라."
이 사건으로 그는 십자가 예수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를 분노케 했던 예수의 죽음과 부활 소문이 사실이었다. 그는 회심했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사도로 180도 바뀌었다.
이때부터 그는 유다인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이방인들을 찾아다니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했다. 세 차례에 걸쳐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열렬하게 복음을 선포했다. 발이 부르트도록 걷고, 유다인들에게 붙잡혀 돌팔매질을 당하고, 감옥살이도 하고, 예루살렘 사도회의(초기 그리스도교 지도자 모임)와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사도로서의 열정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때로는 감옥에서 쓴 눈물의 편지로 그리스도인들의 일치와 화합을 호소하기도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인류를 위해 선포된 기쁜소식이다. 하지만 바오로가 없었더라면 그 복음은 유다교의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있다 이내 소멸됐을지도 모른다. 바오로가 교회 역사에서 제일 위대한 별로 빛나는 사도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스스로를 희생할 각오로 복음선포 투신해야
2, 어떻게 지내야 하나
그의 생애와 사상에는 두 맥(脈)이 관통한다. 하나는 이방인들 속으로 들어가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치와 화합을 다진 것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바오로의 해'를 선포하며서 특별히 두 가지를 당부했다. 신자들이 성 바오로와 그의 서간을 깊이 이해하고, 교파를 초월해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대화하며 일치를 모색하라는 것이다. 교황은 "오늘도 그리스도께서는 바오로 성인처럼 스스로를 희생할 각오가 돼 있는 사도들을 바라십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성 바오로와 그의 서간들을 깊이 받아들이면 그처럼 '복음의 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목숨을 걸고 지중해 연안은 물론 로마 심장부까지 달려가 복음을 전했다.
바오로는 2000년 전 사도지만 21세기 인류 복음화의 모델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가 선포한 복음의 메시지는 지금도 강력한 힘과 생명력을 갖고 있다.
아울러 '하나의 세례와 한 분이신 주님'을 섬기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과 일치하는데 힘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버린 다음 하느님과 일치해야 하고, 교회와 일치해야 한다. 이어 '불고 싶은 대로 부시는'(요한 3,8) 성령의 발자취가 남겨진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열린 대화의 장으로 초대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찾아가고, 갈라진 형제들을 대화의 장으로 초대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교구와 수도회들은 바오로 해를 풍요롭게 보내기 위해 각종 강연, 심포지엄, 서간필사, 서적출간 등을 서두르고 있다. 수원교구와 의정부교구, 그리고 바오로 가족 수도회가 특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1년 동안 그리스도교 박해자에서 열렬한 복음 선포자로 바뀌어 한 생을 살다 간 위대한 사도의 삶과 정신을 접할 것이다. 활활 타오로는 장작불보다 뜨겁고, 한 편의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한 바오로의 세계를 향해 닻을 올린다.
[바오로의 해] (2) 나는 하느님 교회를 몹시 박해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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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마스쿠스 가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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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5~36년 어느 날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지 2~3년쯤 지난 시점이다.
유다 율법을 신봉하는 바리사이파 바오로는 나자렛 예수의 추종자들을 체포하러 다마스쿠스(예루살렘에서 200㎞ 떨어진 지금의 시리아 땅)로 말을 몰았다.
예수는 이미 두 해 전에 십자가에서 숨을 거뒀다. 그런데도 부활이니 오순절 성령강림이니 하는 괴소문(?)이 끊이지 않고,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디아스포라(이스라엘 밖 유다인 집단거주지)로 달아나 비밀집회를 열고 있었다.
바오로는 율법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그들을 보고 분개했다. 그의 손에는 대사제가 발행한 그리스도인 체포령이 들려 있었다.
# 주님은 누구십니까? 태양이 작열하는 끝없는 사막을 가로 지를 때였다. 하늘에서 갑자기 번개같은 빛이 쏟아지더니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말이 놀라서 앞발을 들고 날뛰는 바람에 그는 땅으로 나자빠졌다. 그는 섬광같은 빛에 눈이 멀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잠시 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도 9, 1-19 참조).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그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그와 동행한 사람들은 소리는 들리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멍하게 서 있었다. 사람들은 얼이 빠진 그를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그는 예수가 보내준 하나니아스에게서 안수를 받고 난 뒤에야 눈에서 비늘 같은 게 떨어져 다시 볼 수 있었다.

▲ 바오로의 다마스쿠스 회심 사건을 묘사한 카라바조의 '성 바오로 회심'(캔버스에 유화, 230x175㎝, 1601년 작, 로마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성당).
강렬한 빛에 놀라 말에서 떨어진 바오로는 두 다리와 팔을 벌린 채 무기력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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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교 이탈자들을 색출하러 가는 길에서 만난 봉변, 이 다마스쿠스 사건으로 그는 교회 박해자에서 열렬한 복음 선포자로 변신한다. 기운을 차린 뒤 즉시 다마스커스 회당에 뛰어 들어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마스쿠스 회심 사건은 그가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받은 사도"(로마 1, 1-2)라고 고백하는 근거가 된다. 복음 선포의 출발점이 이 사건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 사건은 한 개인의 회심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 차원에서 봐야 하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충격에 빠진 바오로에게 하나니아스를 보낼 때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고 일러줬다. 바오로도 "(하느님은)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6)라며 이 사건이 계시에 의해 일어났다는 점을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밝혔다.
그럼 주님은 왜 교회를 없애버리려고까지 한 바오로를 '그릇'으로 택했을까? 더구나 과장된 겸손인지 모르겠으나, 스스로를 "칠삭둥이 같고, 사도로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1코린 15, 8)이라고 하는 자를 말이다. 그의 출생과 성장 배경을 살펴보면 궁금증이 풀린다. 4. "나는 하느님 교회를 몹시 박해했습니다"
그는 소아시아 킬리기아 지방 타르수스(사도 21, 39 현재의 터키) 사람이다. 집안 전통에 따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유다인이었다. 율법이 명하는 대로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다.
그는 회심 이전에 예루살렘을 몇 차례 방문했을 것이다. 흠잡을 데 없이 충실한 율법 엄수(嚴守)자였기에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동경하지 않았을 리 없다. 아예 이주해서 살은 적도 있는 것 같다.
"나는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사도 22, 3).
가말리엘은 매우 유명한 바리사이 율법교사다. 바오로는 스승의 영향으로 율법 열광자가 됐다.
또한 타르수스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는 깃발 아래 있던 그리스 로마 도시였는데, 산업과 교역이 번창했다. 특히 소아시아 그리스 문화(헬레니즘 문화)와 근동의 셈족문화(히브리 문화)가 교차한다.
바오로는 타르수스에서 두 문화를 접하며 타문화에의 개방성을 익혔을 것이다. 두 문화권에서 성장하며 헬라어와 히브리어 두 언어를 구사하는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운 주님 섭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그는 구체적 정황은 밝히지 않았으나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했다"(1코린 15, 9)고 털어놨다. 스테파노가 모세와 율법을 모독한 죄로 성 밖에서 돌팔매질을 당해 죽는 광경도 목격했다. 그는 그때 여느 유다인들처럼 스테파노의 메시아 증언에 노발대발하며 이를 갈았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사도 8,3).
스테파노 순교는 역으로 복음의 씨앗을 사방으로 퍼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난과 박해에 놀란 그리스도인들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와 다마스쿠스까지 흩어졌기 때문이다.
바오로의 회심 사건은 이들을 붙잡아 들이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는 거기서 한 순간에 그리스도에게 사로 잡혔다. 그러자 전에는 이롭던 것이 모두 해로운 것이 되고 말았다(필리 3,7).
불 같은 성격의 바오로는 그때부터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 9,22)이 되려는 주님의 종으로 새 삶을 시작한다. [평화신문 /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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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도 바오로 | ▨ 사울과 바오로
"바오로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으로…"(사도 13,9)
사도행전에 사도의 이름은 바오로, 사울 두 개가 등장한다. 그렇다고 중간에 개명(改名)을 한 것은 아니다.
사울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유다사회 전통에 뿌리를 둔 이름이다. 그리고 바오로는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통용된 이름이다. 두 이름은 사도가 두 문화권에 속해 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증거이다.
바오로는 자신의 유다인 혈통을 강조한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필리 3, 5).
그러나 다마스쿠스 회심 사건 이후 그는 거의 대부분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유다사회 안에서 시작된 그의 선교활동이 그리스 로마 세계를 지향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사도가 자신의 이름을 사울이라고 직접 언급한 적은 한 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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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신문 /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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