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2008년 10월 8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도구 Ludovicus 2008. 10. 8. 08:56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8년 10월 8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제1독서 갈라티아서 2,1-2.7-14

형제 여러분, 1 십사 년 뒤에 나는 바르나바와 함께 티토도 데리고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갔습니다. 2 나는 계시를 받고 그리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민족들에게 선포하는 복음을 그곳 주요 인사들에게 따로 설명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전에 한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7 그들은 오히려 베드로가 할례 받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내가 할례 받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8 할례 받은 이들을 위하여 베드로에게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신 분께서, 나에게도 다른 민족들을 위한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9 그리고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10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
11 그런데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12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13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14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복음 루카 11,1-4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비행기는 지상으로부터 8,000미터 이상의 고공으로 비행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비행기 바깥의 온도는 영하 40~50도 정도가 되고, 산소도 거의 없어서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행기 안에는 어떨까요? 비행기 안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지요. 비행기 바깥과 달리 적절한 온도와 알맞은 산소가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상징되는 인생의 겨울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주님 안에만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쉽게 살아갈 수 있는 적절한 힘과 알맞은 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주님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 밖으로만 나아가려 합니다. 주님 밖이 훨씬 넓고 할 일도 많아 보이지요. 주님 밖이 나에게 더 큰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만이 내가 살 수 있는 공간이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느님 아버지께 쉽게 나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기도’를 직접 가르쳐주시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하느님을 멀리 계신 분으로 보고 감히 ‘아버지’라는 표현을 쓸 수가 없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라는 호칭을 쓰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쉽게 주님 안으로 들어와 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이제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받아 들여 스스로 변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5,000원짜리 쇠붙이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연장을 만들어 5만 원짜리가 되었지요. 또 어떤 사람은 바늘을 만들어 50만 원짜리가 되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명품 시계를 만들어 500만 원짜리가 되었답니다. 같은 물건이 어떤 물건으로 변화되느냐에 따라 값어치가 달라지는 법이지요. 같은 사람도 그가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서 천한 사람도 되고 또 반대로 귀한 존재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안에 있을 때 귀한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 주님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어느 곳에 자리 잡고 있을까요?

이란 테헤란에는 아름다운 궁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궁전을 다 짓고 유리를 끼우려다가 유리가 깨지고 만 사건이 있었지요. 다시 유리를 만들어 끼우려면 여러 달이 걸리기 때문에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때 어느 기술자가 이 깨진 유리 조각을 잘 이용하여 아름답게 창문에 끼웠는데 그 깨진 조각으로 햇빛이 비칠 때마다 찬란하게 무지개 색깔을 냈습니다. 그리고 그 창문 때문에 오히려 관광객들이 더 모여 들었지요.

내가 주님 안에 있지 않다고 생각되는 고통과 시련 안에 있을 때, 주님의 기도를 천천히 의미를 새기면서 바쳐 보십시오. 깨진 유리 조각이 아름다운 빛을 내듯이, 우리의 삶도 주님 안에서 더욱 더 빛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정성을 다해 바치도록 합시다.



한 우물을 파라(네꼬)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라. 샘물이 날 때까지.’

이 말은 20세기의 성자 슈바이처의 그 유명한 좌우명입니다.

가진 재주 많아 온갖 것을 다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 행복하고 신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창조주가 이 모든 재능을 준 사람은 이 세상에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대신 가장 잘 하는 한 가지 재주를 사람들 모두에게 주었습니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운동을 잘 하는 사람.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재주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고 또 자신의 재주를 알면서도 늘 남의 밥상이 커 보여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은 하루 이틀을 지날 때는 모르지만 달이 가고 해가 가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한 우물을 파야 합니다. 한 우물을 10년만 파면 반드시 생수가 나올 수 있습니다.

주위의 한 가지 주어진 일이나 직업에서 10년을 일한 사람을 보십시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열의 아홉은 성공을 했거나 성공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까?
출처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글쓴이 : 빠다킹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