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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부활과 죽은이들을 위한 기도

도구 Ludovicus 2008. 3. 6. 06:56

부활 논쟁"(루카 20:27-38)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과연 죽은 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될까?"하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결혼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죽는 일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죽은 후 우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존재양식이 아닌 다른 존재양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있다"라는 정의는 "볼 수 있다, 말할 수 있다, 만질 수 있다 등"의 감각적인 자료에 의지하지만, 죽은 후 우리는 그러한 존재양식이 아닌 다른 존재양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와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존재론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한 논쟁을 통해 시간의 개념을 설명하신다.

내가 어렸을 때 했던 질문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하느님은 또 어디에서 오셨는가? 하느님이 계시기 전에는 누가 있었나?" 또 "영원히 살아간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하면서 그 긴 시간을 살아가는가?", "우주를 한없이 가다보면 결국 끝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도대체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이런 질문들은 내 사고가 시간과 공간에 속박된 상태에서 갖게 되는 질문이다. 시간과 공간은 시간과 공간에 속박되지 않으신, 즉 시간과 공간이 없으신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시공(時空)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고 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은 시간과 공간에 속박되어 있기에,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참된 진리의 인식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때에 가능하다.

불교의 경전 '유마경'에는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가고, 겨자씨가 수미산에 들어가는 것"을 깨우치는 지혜를 얻을 때 비로소 참된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 했다. 수미산이라는 거대한 산이 어찌 겨자씨와 같은 작은 씨에 들어가고, 수미산과 같은 거대한 산이 어떻게 그 작은 겨자씨를 산에 가득 채울 수 있는가? 그것은 공간적인 크기 개념으로 보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공간이 없는 개념으로 바라본다면 그 뜻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때론 개미나 미생물들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작은 것에 있을 것이 다 있고, 또 활동하고 있는가하는 질문을 해본다. 그 역시 그것들을 창조하신 하느님께는 공간의 개념이 없으시기에 우주의 크기나 사람의 크기가 개미나 미생물의 크기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수미산의 비유는 공간을 초월한 인식이 참된 진리라는 것이며, 하느님이 내 안에, 내가 하느님 안에 존재함은 공간을 초월한 인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은 어디에 있을까? 공간적인 개념으로 여기에 있거나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존재 양식으로 있기에 우리는 천국이 이 세상 어디에도 있고, 또 어디에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구약에는 천년도 하느님께는 지나간 하루 같다는 표현이 있다.(시편 90:4) 이는 하느님께는 천년이건 만년이건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분께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으시기 때문에 천년, 만년이라는 시간 자체가 의미가 없다. 때론 사람들은 인류의 역사를 수십만년, 지구의 역사를 수십억년으로 보며, 우주는 수백억년의 시간이 지나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어떻게 우주는 그 수백억년 동안 아무것도 없이 천천히 진행되어 왔는가? 물론 우리의 시간개념으로는 당연히 있었던 일일 것이다. 실제 수십억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지구가 생성되고 인류의 역사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시간이 없으신 분이시기에 그러한 시간의 흐름에 구속되지 않으시는 것이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7-38)

모세는 "주님은 돌아가신 모든 조상님들의 하느님"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하느님은 내 10대 조상님, 9대 조상님 … 나 그리고 내 10대 후손, 11대 후손 … 의 하느님이라는 말과 같다. 하느님은 모든 시간을 초월하시기에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는 마치 모든 시간이 한 그릇 안에 담아져 있는 것과도 같다. 즉, 이미 죽어 없어진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께는 모든 이들이 존재하기에 산 이들의 하느님이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100년 전에 돌아가신 분을 위해 지금 기도하더라도, 시간이 없으신 하느님께는 의미가 있다. 이미 100년 전에 돌아가셨기에 모든 상황이 끝난 것이 아니라, 그분이 100년 전에 돌아가실 때 바로 지금 내가 드리는 이 기도 때문에 구원을 받으실 수가 있는 것이다. 비록 그분이 예수님을 모르고 돌아가셨을지라도 지금 나의 기도 때문에 죽는 순간에 예수님을 맞이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죽은 이들을 위해 우리는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부활논쟁에서 바로 이것이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의미임을 말씀하신다. 즉 시간이 없으신 하느님께는 모든 이들이 살아 있는 것이기에, 과거의 사람들이나, 현재의 사람들이나, 미래의 사람들 모두에게 현존하시는 분이시다. 바로 이것이 부활의 의미인 것이다. 그러기에 과거에는 육신 그대로 부활한다는 생각에 그리스도인들은 화장(火葬)을 하지 않았지만, 이 부활의 의미를 깨닫는다면 그러한 부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죽어서 영원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도 바로 시간이 없는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는 죽음을 통해 시간과 공간이 없는 곳에서 다른 존재 양식으로 주님과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예수회 손우배 신부 //

출처 : 선교사랑방
글쓴이 : 주사 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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