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2월 20일 사순 제 2주간 수요일

도구 Ludovicus 2008. 2. 20. 07:52

 

 

                            2월 20일 사순 제 2주간 수요일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0,17-28


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18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9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비위맞추는 데 너무 힘이 들지요?


  나는 아주 좋지 않는 대인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준에 미치지 않으면 잘 사귀려 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친구나 제자나 가족 모두에게도 그렇게 대합니다. 특히 변덕을 부리는 것을 싫어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좋지 않은 성질일 뿐만 아니라 사랑이 없는 이기적인 관점과 이기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직장에서도 바른말을 잘하고, 들이받기를 잘해서 상사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사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비위를 맞추지 않는 성격을 사회에서는 ‘비빌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만두를 빚을 때 만두피에 속을 잘 넣은 다음 터지지 않도록 잘 붙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붙이지를 못합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말처럼 상사가 싫으면, 잘 붙어 있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떠나려고 생각합니다. 내 성질을 죽이고, 그 속에서 아양도 떨고, 비위도 맞추고,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려서 어른들은 나를 보고, ‘제 고집대로 사는 아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약한 생활태도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집대로 사는 성격이 다른 사람들의 밑에서 일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누구를 섬긴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터득한 편입니다. 대인관계에서 섬기며, 섬김을 받는 사람들의 관계는 참으로 묘한 신분관계에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분명 섬기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섬기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충성을 다한다고 합니다. 무엇이 충성을 다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면, 자신의 마음에 중심을 잡고 그 중심에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서 성실하고 어긋남이 없이 사는 것을 충성이라고 합니다. 역사에서 사육신(死六臣)이나 생육신(生六臣)을 충신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왕에게 비위를 맞추며 아첨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사실 세종대왕이나 문종, 단종에게는 충성을 다한 사람이지만 세조에게는 불충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충신이라고 하는 것은 양심에 의해서 섬김을 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왕에게 아첨한 것이 아니라 양심과 하느님의 법에 충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2000년이 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고, 박해를 받기도 하였으며, 권력에 아첨하며 산 사람들도 있고, 세상의 대세에 몰려 잘 못 산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근본에 하느님의 말씀이나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들도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박해를 받고 순교한 성인들이 교회를 이끌어왔으며 믿음을 지켰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섬기는 대상이 누구인지 잘 모르고 살기 쉽습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누구를 섬기는지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국민을 섬기는지 정당을 섬기는지, 대통령을 섬기는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리당략(黨利黨略)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정당정치의 원칙입니다. 그 당리당략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로 국민은 나눠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를 넘어서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아첨과 빌붙어서 비비기를 잘하는 사람들이 대인관계도 좋습니다.

 

그런 것을 좋아하는 사회로 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정한 섬김의 자세나 복음의 정신은 퇴색된 사상으로 몰아붙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왜곡해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닐 것입니다. 진정한 섬김의 자세를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통치자가 종의 신분을 취하고,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그렇게 살 것이며, 그렇게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직자와 봉사자는 이제 종(從)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순교자와 함께하는 하루-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예로부터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보호하심에 달아드는

자는 아무도 버림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성문을 향하여 갔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여섯 번째 편지 중에서)  

       

~ 이창순 야고보 선생님의 묵상글 ~  

             

 

 

 


  


출처 : 사랑이 머무는 자리
글쓴이 : 요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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