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2008년 2월18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도구 Ludovicus 2008. 2. 17. 22:51

 

 

                       

                       2008년 2월18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6,36-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숭례문(崇禮門)

 

  남대문(崇禮門)이 완전 전소 된지 일주일이 되었습니다. 어려서 시골에 살 때 서울을 가본 사람과안 가본 사람과 싸우면 안 가본 사람이 이긴다고 했습니다. 서울을 가보지 않으면 남대문이 얼마나 높고 근사하던지 말할 수 없었다고 하였지요. 그리고 남대문(南大門)이라고 써 붙여놓은 현판은 양녕대군의 휘호라고 했는데 큰대(大)자의 파이가 정말 대단하였고 허풍을 떨어놓으면 가본 사람도 무슨 말인지 몰라서 안 가본 사람에게 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도 중학교 때 서울 구경을 처음으로 하였는데 서울역에 도착해서 제일먼저 바라본 남대문에는 숭례문(崇禮門)이라는 현판이 있어서 아마 뒤쪽에 남대문이라고 현판이 있겠지 하고 먼길로 돌아가면서 보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내 고향에는 읍성(邑城)이 있었고, 동문(東門)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려서 모든 사람들이 동문이라고 했는데 한자 공부를 조금하고서 읍내에 가서 그 문을 보았는데 ‘조양문’(朝陽門)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어서 한참 동안 아는 체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에 가느라고 남대문을 나는 일주일에 거의 두 번씩은 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픈 추억으로 그 문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삶의 중심 가치로 두고 살고자했던 어른들이 ‘백성들이 예를 갖추어 도성에 들어오라.’고 남대문을 숭례문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남대문이 타버린 것은 우리들이 예(禮)에 따라서 살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부모와 자식의 예, 스승과 제자의 예, 조상과 후손들의 예, 형제와 이웃의 예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느님께 대한 예는 아주 천박해졌고, 형식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전례는 낡고 고루한 것이라고 비판을 함부로 하고 있으며, 서양의 예를 왜 동양에서 따르느냐고 비판하면서 동양과 우리나라의 전통적 예법에 대하여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고, 모든 것을 무조건 비판만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남대문이 전소된 것을 가지고 그 불똥이 자기에게 떨어질지 모른다고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문화재청에서는 진화하는 방법을 상의하지 않았다고 호통이고, 소방청에서는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난리고, 불을 놓은 사람은 정부에서 보상을 잘못해준데 대한 앙심을 품고 불을 질렀다고 했고, 열차 폭파도 계획했었다고 했습니다. 남대문을 개방하지 않아야 하는데 개방해서 그렇다고 한 편에서는 개방을 탓하고 있습니다. 개방했을 때는 잘했다고 박수치던 모든 사람들이 다시 화살을 돌리고 있습니다. 모두 사람들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데 열을 높이고, 커지고 있습니다. 그럼 누구의 잘못인가요? 모두 비판은 잘하고 판단도 잘하고 단죄도 잘하는데 누가 비판 받아야 할 사람인가요? 누가 단죄 받고, 누가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인가요? 경찰이 수사하면 판결이 날 것인가요?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기 싫은 것입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솔직하게 시인하고 용서를 청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자존심은 적어도 모두에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옹졸한 자신에게만 국한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존심은 결국 자신의 울타리를 더욱 두껍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나는 쓸데없는 오만과 편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탈무드에 있는 말이 다시금 새롭게 다가옵니다.


[신의 천지창조의 마지막 날 인간을 만드신 것은 인간의 오만함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몸을 닦는 것은 비누고, 마음을 닦아내는 것은 눈물이다.]

[사람들은 길에서 넘어지면 먼저 돌을 탓한다.]

[이미 행해진 행동은 변하지 않고 남게 되지만, 그러나 인간은 날마다 변해 간다.]


     ‘안연문인, 자왈; 극기복례위인. 일일극기복례, 천하귀인언. 위인유기, 이유인호재’(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논어의 안연 편에 있는 말입니다. <안연이 인에 대하여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의 사욕이나 딴 생각을 극복하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다. 하루하루 자기를 이겨내고 예로 돌아가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에 귀착하게 될 것이다. 인을 실천하는 것은 자기에게 달린 것이지, 남에게 달린 일이 아닌 것이다.> 주님의 말씀대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사랑과 감사와 존경이 몸에 배어나야 한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매사에 감사하면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 모두를 하느님으로 존경해야 최상의 덕인 사랑에 이르게 된답니다.

 

    우리는 잘못을 알면서도 눈물로 용서를 청할 줄 모르고 고집을 피우고 있고, 자신의 불성실과 오만함을 탓하지 않고, 길에 박혀있는 돌을 탓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언제나 정당화 시키기도 합니다. 매일 변해가는 자신을 살펴볼 생각은 눈꼽  만큼도 하지 않고 말입니다. 이제 숭례문이 불에 타 없어지듯 예(禮)가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자신을 돌아봅니다. 모두 내 탓입니다. 모두 나의 오만함 탓입니다. 모두 나의 겸손하지 않은 탓입니다. 내가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며, 용서하지 않고, 치사하게 되질한 탓입니다.


 

 

                                -순교자와 함께하는 하루-


리부아 대표 신부님께서 메스트로 신부님이 저를 데리고 조선으로 가도록 배정

하셨습니다. 이 여행이 비록 험난할 줄을 압니다마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무사하게

지켜 주시리라 희망하고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첫 번째 편지 중에서)  

       

~ 이창순 야고보 선생님의 묵상글 ~ 
 
  
 

 

출처 : 사랑이 머무는 자리
글쓴이 : 요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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