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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08년 1월 21일 연중 제 2주일 월요일 야고보 선생님의 복음묵상

도구 Ludovicus 2008. 1. 20. 22:01

 

 

                    2008년 1월 21일 연중 제 2주일 월요일 복음묵상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8-22


그때에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가끔 내가 갑자기 아파서 아무도 못보고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나를 떠나보내는 가족들의 슬픔을 생각하면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기도 합니다. 그런 생각뿐만 아니라 갑자기 가족 중에 누가 나를 떠나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해봅니다. 내 가족들에게 남겨진 그 빈자리와 내게 남겨진 그 빈자리가 생각납니다. 있을 때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그 빈자리가 나를 미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아마 죽을 때까지 방황할 것입니다. 지금은 잘 모르는 그 ‘빈자리’ 말입니다. 학교에서 출석을 부를 때, 갑자기 한 아이가 결석하면, 그 텅 빈 자리가 보입니다. 그러다 전학이라도 가면 그 빈자리가 가득히 전해 옵니다.

 

   내가 없는 그 빈자리는 의미가 있는 자리가 될지 생각해 봅니다. 그러다가 며칠이 지난 다음에 잊는 그런 빈자리가 될 수도 있고, 정말 앓던 이를 빼놓은 것처럼 그렇게 시원섭섭한 자리도 될 수 있지만 정말 오래 동안 가슴에 가득 아픔으로 남는 자리가 될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 빈자리가 큰 슬픔으로 보일지, 아픔으로 느껴질지, 웃음으로 간직될지, 반가움으로 새겨질지, 상실감으로 다가올지 나는 모릅니다. 그건 내가 그 자리의 주인으로 있을 때 어떤 존재였는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그냥 내가 지켰던 자리가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그 동안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사랑의 의미가 전혀 없는 자리였다면, 내가 떠난 다음에 그 자리를 쳐다보면서 나는 많은 후회를 할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죽음이 닥쳐오면 네 가지의 후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좀 더 사랑하며 살 걸, 좀 더 나누며 살 걸, 좀 더 참을 걸, 좀 더 즐겁게 살 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이렇게 두 가지의 대답을 덧붙일 것입니다. ‘용서 받지 못한 것, 그리고 나로 인해 받은 상처를 어루만지지 못한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것이 내가 없는 빈자리를 맴돌며 있을 것입니다. 그 빈자리에는 언제나 그 후회 때문에 참으로 공허할 것입니다. 왜 그렇게 오만한 마음과 교만한 마음으로 용서를 청하지 못하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용서를 청한다는 것은 잘못해서 용서를 청하는 것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를 청한다는 것은 내가 용서를 청하는 사람과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그를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의 마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의 마음 안에 산다는 뜻입니다. 나는 머리로만 다른 사람들을 이해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를 용서할 수 있고, 또 용서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용서는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살았던 자신이 위선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내가 상처를 준 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생각에 견딜 수 없는 괴로움도 같이 느끼고 있답니다. 매일 그 것에 씨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오래된 감정을 지금 건드려 터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오래된 상처를 지금 내 생각으로 수정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한 것이 고의적이 아니었다고 변명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을 드러내놓고 시시콜콜 따지고 분석해서 이렇게 잘못되었고, 이렇게 마음에 상처를 주었으니 보상 차원에서 내가 이렇게 하겠다고 하는 것은 더 얄팍한 내 이기주의적 발상입니다. 다만, 그동안 내가 만들어준 상처들을 기워 갚기 위해서 기도할 뿐입니다. 매일 바치는 화살기도가 주님께 전달되어서 주님께서 위로를 주시고, 상처를 어루만져 주실 것을 간절히 청원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혼인잔치에 참석하시고, 손님들과 함께 계시며,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시고, 음식을 나누시고, 모든 세상의 유혹과 분노를 참으시며, 즐겁게 계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강제로 손님들로부터 강도에게 빼앗길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혼인잔치에서 신랑을 빼앗아 매를 치고, 가시관을 씌우고,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할 것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메울 수 없는 빈자리가 생길 것입니다.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은 빈자리가 제자들의 가슴에 구멍을 뚫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 빈자리를 보고, 빈자리를 느끼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아파하고, 슬퍼하며, 단식하고, 식음을 전폐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많은 후회와 회한이 제자들을 더욱 아프게 할 것입니다. 내가 좀 더 사랑하고, 나누며, 좀 더 즐겁게 살며, 그 모든 분노와 유혹에서 참고 살 것을 뉘우칠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용서 받지 못할까 봐서 전전긍긍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드린 상처를 메울 길이 없어서 아파할 것입니다. 

 

    오래 동안 교회에 다니며 신자로서 살았다고 큰소리치면서도 내 몸에 잘 맞는다고 매일 그 옷만 걸쳐 입은 헌 옷도 아니고, 새 옷도 아닙니다. 헌 가죽 부대도 아니고, 새 가죽 부대도 못 됩니다. 나는 어정쩡한 신자이며,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내가 없어져도 그 빈자리는 아침에 풀잎에 맺혔다가 아침 햇살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슬과 같이 아무런 흔적도 없을 것입니다. 밤 새 풀이 숨 쉬며 한 숨을 뽑아내면서 만들어낸 고통의 즙액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될까봐 겁이 납니다.


  주님, 정말 아픔과 슬픔의 흔적이 남지 않고, 아름다운 사랑이 함께 하였던 당신의 아들이 되게 하소서. 자비와 은총의 하느님 아버지!!


-순교자들과 함께하는 하루 -


비신자들은 천주교의 진리에 관하여 떠도는 소문을 듣거나 또는 신자가 당한 어떤 환난 등의 사건을 통하여 마음속으로 감동을 받아서 이것이 계기가 되어 스스로 신앙을 가지게 되고 신자들 사회에 받아들여지게 쇠는 것이 보통입니다.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편지 중에서)

 

 


~ 야고보 선생님의 묵상글 ~
 

 

출처 : 천주교인터넷선교단
글쓴이 : 요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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