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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2월 23일 대림 제4주일 가해[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

도구 Ludovicus 2007. 12. 23. 15:56
2007년 12월 23일 대림 제4주일 가해

제1독서
이사야 7,10-14

그 무렵 10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이르셨다.
11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
12 아하즈가 대답하였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
13 그러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14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제2독서 로마서 1,1-7

1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2 이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3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 4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5 우리는 바로 그분을 통하여 사도직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6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에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7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로마의 모든 신자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복음 마태 1,18-24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합니다

자신은 운이 없어서 재산을 모을 수 없다며 매일같이 울상을 짓고 사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한 노인이 젊은이의 근심 어린 표정을 보고는 “젊은이,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은가?”하고 물었지요. 이에 젊은이는 대답합니다.

“저는 왜 이렇게 가난한지 모르겠어요.”

“가난하다고? 내 눈엔 자네가 부자로 보이는데?”라고 노인은 진심 어린 말투로 이야기했지요. 젊은이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라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대답은 않고 이렇게 되묻는 것이었어요.

“내가 오늘 자네의 손가락 하나를 부러뜨리는 대가로 10만원을 준다면 그렇게 하겠나?”

“미쳤습니까? 저는 그렇게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자네의 한 손을 부러뜨리고 100만원을 준다면 그렇게 하겠나?”

“겨우 100만원을 받고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저는 싫습니다.”

“자네가 지금 당장 팔십 세 노인이 되겠다면 1000만원을 주지. 그렇게 하겠나?”

“팔십 세 노인이면 이제 얼마 살지도 못할 텐데, 1000만원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싫어요.”

“자네가 지금 당장 죽는다면 1억 원을 주지. 그렇다면 하겠나?”

“죽으면 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싫습니다.”

“거봐. 자네는 이미 1억이 넘는 돈을 가지고 있는 셈이지 않나? 그런데 뭐가 가난하다고 불만이야?”

그제야 젊은이는 더 이상 불평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이미 가지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 이 젊은이의 모습은 아닐까요? 즉,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한 불평과 불만으로, 있는 것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요셉 성인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는 성모님의 잉태소식을 듣고는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결정하지요. 이 말은 그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혼자서 결정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즉, 그는 스스로 판단했고 스스로 결정했던 것이지요. 아마 그는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하필이면 자신의 약혼녀 마리아에게 이런 일이 생기냐고 말이지요. 하지만 혼자 했던 그의 판단이 과연 올바른 판단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강생할 예수님을 맞이하지 않는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개입하시지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임마누엘의 뜻처럼,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 곁에 강생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바로 이때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 안에서 참된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불평과 불만을 떠올려 보세요. 혹시 하지 말아야 할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이 최악은 아니다(앤드류 매튜스, ‘즐겨야 이긴다’ 중에서)

누구나 삶이 지독히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세상에 자기 혼자만 남은 듯하고 청구서는 쌓이며, 직장은 잃고, 사랑하는 사람도 떠났다. 눈앞이 막막해 막막해지면서 세상이 온통 잿빛으로 물들었다. 숱한 문제가 매설된 지뢰밭 같은 미래를 떠올리며, 누구도 지금과 같은 위기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라 한탄한다.

로버트 슐러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나는 즐겨한다. 그들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졌다. 먼저 남자가 말했다.

“다 끝났어요. 난 끝장이에요. 돈을 몽땅 날렸어요. 전부 잃었다고요.”

슐러가 물었다. “여전히 볼 수는 있나요?”

“네, 아직 볼 수 있어요.”

“여전히 걸을 수는 있나요?”

“네. 아직 걸을 수도 있죠.”

“내게 전화한 것을 보니 분명 들을 수도 있겠죠?”

“네. 물론이죠.”

“그럼, 모든 게 그대로군요. 잃은 건 당신 돈뿐이군요.”

누군가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 최악의 일은 뭔가요? 그런 일이 일어나도 살 수 있을까요?” 최악의 일이 일어난다면 몹시 고통스럽겠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다음 질문이 이어진다. “그런 상황에서도 배우는 게 있을까요?”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많은 경우 어려운 시기에도 배우는 바가 있다. 시련은 삶의 균형을 이루게 하고, 고통 중에서도 배우는 바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성공한 사람일수록 어려운 시기를 배움의 기회로 삼는 법이다. 이들은 턱을 치켜들고 얼굴에 웃음을 띤 채 상황이 곧 좋아질 것을 믿으며, 시련에서 빠져나올 때에는 한층 성숙한 사람이 된다.

아울러 자신을 더 사랑하는 가장 경이로운 방법 가운데 하나는, 누군가를 위해 뭔가 해 주는 것이다. 지나친 걱정과 자기 연민은 자신만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꽃을 보내든, 페인트칠을 도와주든, 말동무가 되어 주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무엇이든 하라. 그 순간 당신도 행복해진다.

행복도 사랑도 기쁨도 넘치는 한주간 주님과 함께 나누는 시간이 되시길 기도 합니다


출처 : 내가 네 힘이 되어 주겠다
글쓴이 : 가난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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