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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 정조가 본 ‘금강산 그림’ 그대로

도구 Ludovicus 2010. 3. 17. 07:44
200년 전 정조가 본 ‘금강산 그림’ 그대로
단원 김홍도의 ‘금강사군첩’ 본떠 그린 ‘75폭 와유첩’첫 공개
16일 공개된 금강산 ‘와유첩’과 정조 ‘어찰첩’에서 뽑은 그림과 글씨. 조선 후기 문예부흥을 이끌었던 정조 시대의 서화 수준을 엿볼 수 있다. ①기묘한 금강산 봉우리를 담은 ‘만물초’ ②해 돋는 ‘낙산사’ ③물감이 산화돼 거뭇거뭇한 ‘단발령’ ④김홍도 화법을 따른 ‘신계사’ ⑤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려 쓴 축시. [옥션 단 제공]
일제 강점기와 전쟁통에는 문화재급 유물을 숱하게 잃었다. 기록에는 보이지만 실물은 사라져버린 귀한 보물이 한둘이 아니다.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正祖·재위 1776~1800)가 단원 김홍도(1745~?)에게 특명을 내려 제작한 그림첩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도 그중 하나다. 나랏일을 돌보느라 풍류를 즐길 여유가 없었던 정조. 1788년 꼭 가보고 싶지만 갈 수 없던 금강산 부근 4군(郡)의 명승지를 그려 오도록 단원을 보냈다. 이때 단원이 사생해 남긴 것이 70폭 ‘금강사군첩’이다. 이 중 몇 점이 뿔뿔이 흩어져 전해오지만 온전한 실체는 어림잡을 뿐이다.

정조가 방 안에 앉아 즐겼다는 단원의 금강산 그림은 어떤 것이었을까. ‘옥션 단’(대표 김영복)이 19~25일 프리뷰에 내놓은 ‘와유첩(臥遊帖)’을 감상하면 정조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와유’는 단어 풀이 그대로 ‘누워서 유람한다’는 뜻이다. 젊어서 누볐던 명승이나 고적 그림을 늙어서 벽에 붙여놓고 즐기는 옛사람들의 취미다. 정조를 모셨던 선비 김계온(1773~1823)은 1816년 50일에 걸쳐 금강산 일대 2400여 리를 유람한 뒤 단원의 ‘금강사군첩’을 떠올린다. 화원에게 부탁해 김홍도의 70폭을 그대로 본떠 그리게 한 뒤 여행 틈틈이 지은 시를 붙여 넣어 자신의 호 오헌(寤軒)을 따 ‘오헌와유록’이라 이름 붙였다. 9권 첩에 75폭을 담은 이 ‘와유록’을 1853년 원본과 똑같이 만든 화첩이 이번에 선보인 ‘와유첩’이다.

‘오헌와유록’은 당시 장안의 사대부들이 서로 빌려 보기를 원했을 만큼 유명세를 치렀다는데 보고 나면 반드시 시나 문장으로 감상을 남겨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이때 감상평은 오늘날로 치면 인터넷 댓글. 200여 년 전 선비들이 주고받은 댓글의 품격을 엿볼 수 있다.

김영복 대표는 “미술사학자 안휘준씨가 보고 ‘연구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내렸다”며 그 이유로 제작 연도가 확실하고, 글과 그림 보존 상태가 완벽함을 들었다고 전했다.

‘와유첩’과 함께 공개된 정조대왕의 ‘어찰첩’도 흥미롭다. 정조가 대학자인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영(1747~97) 등에게 보낸 편지 40통은 군주가 아닌 인척으로서 전하는 따스한 인간미가 드러나 있다. 철 따라 특산물을 챙겨 보내며 일일이 품목을 손수 적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축시를 지은 뒤 어떤가 한 번 봐달라고 보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대목은 편지를 쓸 때 너무 격식에 얽매이지 말라고 충고하는 정조의 목소리다. 글씨를 반드시 정서하려 애쓰지 말고, 종이를 골라 쓰지 말며, 글도 이야기만 통하면 되니 속된 말이나 오랑캐 말도 가리지 말고 편하게 쓰라고 조언한다. 이 역시 오늘날로 치면 e-메일이나 문자를 많이 보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구중궁궐에 들어앉아 정적(政敵)에 둘러싸여 지내던 정조의 고독을 우리가 엿본 것인가.

정재숙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