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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제5주일(100207)

도구 Ludovicus 2010. 2. 7. 18:35

<연중 제5주일>(2010. 2. 7.)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직업을 버리고, 재산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친구를 버리고, 속세를 버리고...

라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우선, 그들은 가족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베드로의 장모 이야기도 나오고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이야기도 나옵니다.

 

또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이나 케파(베드로)처럼

신자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까?“(1코린 9,5)

사도들 중에는 아내를 데리고 다닌 사람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 사도가 어부라는 직업을 버리긴 했지만

직업을 버렸다는 말은 생계를 위한 일 자체를 버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 집중하고

생계를 위한 일은 하지 않았거나 덜 하긴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 경우에는 천막을 만드는 일을 계속 했습니다.

 

재산 문제에 관해서는...

사도들이 재산을 모으는 일을 하지 않았으니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세를 버린 것은 아닙니다.

속세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속세를 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곧 속세를 버리고 떠나는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체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버렸다, 대체 무엇을 버린 것일까?

 

일차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버렸습니다.

인생의 꿈과 계획을 버린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인생을 살겠다는 생각을 버린 것입니다.

가지고 있던 인생관을 버리고, 가치관을 버린 것,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을 버린 것입니다.

 

자,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그것이 한순간에 다 이루어졌을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하시자

제자들은 ‘고기나 잡으러 가자.’ 하면서 호수로 갑니다.

원래의 생활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따르는 동안에도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 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기도 했고,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왼쪽 자리, 오른쪽 자리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야망을 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 수난을 예고하시자

그러면 안 된다고 예수님을 말리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버림’이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꾸준히 계속되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 번 버렸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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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땅을 바라보면,

사람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조그맣게 보입니다.

그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저 작은 세상에서 아옹다옹 다투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만일에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가서 지구를 바라본다면

정말 많은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그렇게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에서,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당연히 인생관과 가치관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몸은 속세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정신과 영혼은 하느님과 함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속세의 가치관을 버려야 합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애를 써가면서 고기를 잡으려고 한 것은

더 많은 고기를 잡아서 돈을 벌고 싶어서 그랬겠지요.

예수님은 일단 베드로를 도와서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게 해주십니다.

그 다음에 그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잡았던 고기를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것은 그 고기들을 팔아서 받게 될 돈을 버린 것이고,

부자가 될 욕심을 버린 것이고,

남들처럼 살겠다는 생각을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더 큰 돈을 벌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더 높은 지위를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약속이란 이런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교회의 반석으로 삼겠다.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또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순교를 예언하셨습니다(요한 21,18).

 

물론 현세에서 버린 것의 백배나 되는 보상을 약속하시긴 했지만

그건 내세에서 받게 될 보상이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베드로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교회의 반석으로 삼겠다.”

그 약속을 하실 때에는 아직 생기지도 않은 교회였습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이것은 영적인 권한일 뿐, 물질적인 부귀영화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라간 것은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기대했기 때문도 아니고,

하늘에서 무슨 복이 마구 쏟아질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아닌 다른 인생을 살기 위해서,

새로운 삶을 위해서 낡은 삶을 버렸습니다.

새로운 인생, 다른 인생,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이고, 사도로서의 인생이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는 것과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라간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이제까지 살던 인생과 다른 인생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들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인생관과 가치관은 비신자들의 그것과는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버렸고, 다른 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더라도

생각이 달라야 하고, 정신이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내 인생의 중심에 ‘나’가 있었다면

믿음을 가진 후에는 인생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이 곧 내 생각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곧 내 말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고 해서 하루 종일 기도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것이고,

어른들은 일을 열심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의 목적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만의 부귀영화, 출세, 성공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선과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한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머리 좋고, 공부 잘 해서 고시에 합격하고 출세가도를 달려서

고위직으로 승진하고 권좌에 오르고....

그 다음에는 교도소에 가거나 역사에 더러운 이름을 남기는...

그런 공부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가 문제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과 믿는 사람이 거기에서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세속의 부귀영화를 약속하신 적이 없는 것처럼

신앙인들에게 세속적인 복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성당에 다니고 기도하는 목적이 그저 복이나 받기 위한 것이라면

크게 착각하고 오해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착각과 오해부터 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그저 조금 더 잘 먹고 잘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땅바닥에서 일차원적인 인생을 살던 사람이

예수님의 손을 잡고 하늘로 올라가서 고차원의 인생을 사는 것,

신앙생활이란 그렇게 인생의 차원을 상승시키는 삶입니다.

 

믿음을 잃거나 소홀히 한다면 그 하늘에서 땅바닥으로 추락할 것입니다.

그러니 중간에 추락하지 않으려면

꾸준히 계속해서, 날마다 성실하게 ‘버림’을 실천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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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r.송영진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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