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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제33주간월요일(091116.월)

도구 Ludovicus 2009. 11. 16. 08:08

<연중 제33주간 월요일>(2009. 11. 16. 월)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예리코의 눈먼 거지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상징적입니다.

그 거지가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의 눈은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크게 바뀌게 됩니다.

 

그는 다시 보게 되자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릅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회복과 전환, 그것이 회개입니다.

 

우리가 그저 먹고사는 것만, 속세의 일만 걱정하고 있다면

그것은 눈먼 거지의 모습일 뿐입니다.

우리는 ‘다시’ 눈을 떠야 합니다.

 

‘회개’란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나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은 원래의 은총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이 집으로 돌아와서 원래의 아들 지위를 회복하는 것,

달아났던 사도들이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와 한 자리에 모인 것,

그 회복이 곧 회개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신앙생활이 타성에 빠졌다고 느낀다면

원래의 상태로 다시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 회복이 곧 회개입니다.

 

유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첫영성체를 받던 그날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어른이 된 후에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세례를 받던 그날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때의 순수한 기쁨을 되찾는 것, 그것이 필요합니다.

회복의 필요를 못 느끼면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선 먼저 자기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찰입니다.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요한 3,3)

 

니코데모가 놀라서 반문합니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요한 3, 4)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 니코데모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미 이렇게 된 인생인데, 무엇을 어떻게 바꾼단 말인가?“ 라고.

(“내비 둬.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래.”)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어린 아이가 되는 것이겠지요.

“하늘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아마도 니코데모 같은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이미 어른이 되었는데, 어떻게 다시 어린이가 될 수 있는가?“ 라고.

 

다시 어린이가 되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어린이의 눈으로 하느님을 바라보고,

어린이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잃어버립니다.

마음에 때가 묻고 탁해집니다.

걱정이 많아지고 계산이 복잡해집니다.

 

서서히 속세의 삶에 눈이 멀게 됩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것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어른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의 맑은 눈이 멀어 있습니다.

 

회개도 은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간청해야 합니다.

“주님,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지금 어린 시절의 맑은 눈과 마음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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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r.송영진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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