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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도 '거기에' 중독되었는가?

도구 Ludovicus 2009. 10. 25. 12:36

교회도 '거기에' 중독되었는가?
[우리신학 산책]
2009년 10월 23일 (금) 02:03:27 강창헌 duniya@catholic.or.kr

   
▲소박한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회복해야 구원이 온다(사진/한상봉)

우리집 앞 작은 공원에는 “oo공원은 금연권장 공원입니다.”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현수막의 권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원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나는 담배 중독자다.

내 삶은 중독에 찌든 삶이다. 25년 넘게 담배를 피워왔고, 하루가 멀다하고 알코올을 들이키고 있다. 그동안 내 몸이 무지막지한 나를 받아들인 과정을 생각해볼 때 아직도 큰 탈이 없다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일이다. 내가 나의 몸에 대해왔던 태도를 고려한다면, 아무리 심각한 질병이 찾아오더라도 나는 고맙게 감수해야만 한다. 지금까지 큰 탈 없이 버텨준 몸에 백만 번 고맙다고 해도 충분치 않다는 것을 적어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알코올에 의지하여 벌인 그 숱한 작태들과 더불어, ‘청자’에서 ‘디스’에 이르기까지 나의 몸이 호흡하며 받아들인 엄청난 타르와 니코틴과 온갖 악성 화학물질들,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끼친 악영향과 아무렇게나 버린 꽁초들, 나의 탐욕으로 사라진 나무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으로 심란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죄의식이 곧바로 회심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독의 해악과 난점은, 알면서도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데 있다. 나쁘다는 것을 머리로 인식하고 죄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중독에서 벗어나기에는 나 자신 너무 무뎌지고 말았다. 죄의식은 나를 중독에서 해방시켜주지 못한다. 중독을 통해 온 몸에 각인된 독소는 제거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바로 일상의 생활방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중독'이란 감옥을 선택한다

어떤 중독 증세를 가지고 있든지 간에, 중독과 결별하기 위해서는 결국 일상의 생활방식을 전면적으로 재고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탈중독은 어떤 회심, 곧 의식의 전환 내지는 생활방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회심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사실상 중독에서 벗어날 의향이 없다는 것이다. 결별할 의향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독소가 주는 편안함과 그에 맞먹는 대체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아니, 다른 대체물이 나타날까봐 두렵기까지 하다. 그래서 나는 당분간 더 중독이라는 감옥 속에서 살기를 선택한다. 수십 년 감옥 속에서만 생활하다가 감옥 밖으로 나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감옥은 나를 가둔 곳이면서도 나를 자유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한편으로 감옥 밖을 꿈꾸지만 다른 한편 감옥 안에서 감옥 벽이 무너지는 것을 걱정한다. 자유란 결코 직면하기 쉽지 않은 선물이다.

중독자의 내면에는 탐욕과 두려움이 숨어 있다. 모든 중독은 참된 감각과 소박한 감수성을 마비시킨다. 중독 대상을 무조건적으로 갈망하게 하고 채워도 채워도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으로 이끈다. 대상을 향한 거의 무의식적인 이 탐욕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종종 폭력으로 이어진다. 도대체 두려울 게 없다면 폭력을 쓸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탐욕과 두려움은 파괴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다. 나의 탐욕과 두려움은 구원받아야만 한다. 아무리 두렵더라도 감옥 밖을 향한 시선마저 거두고서 사람으로 살아가기란 어렵지 않겠는가.

자본주의라는 폭력적 중독

   
▲사진/한상봉
생각해보면 자본주의 산업문명은 그 자체로 거대한 중독문명이며 폭력문명이다. 자본주의적 생활방식의 근간은 효율성과 경제성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엄청난 중독자를 양산한다. 사실은 중독자를 양산해야만 굴러갈 수 있는 기막힌 체제이다.

중독에는 알코올과 담배와 섹스와 마약과 도박만 있는 게 아니다. 물론 국가와 자본이 이러한 중독 산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자본의 하수꾼들이 소위 필수품이라고 우겨대는 텔레비전, 컴퓨터, 휴대전화, 세탁기, 냉장고 등에 이미 우리의 눈과 귀와 입과 몸을 맡겨버렸다. 그러나 사실 이런 상품들이 마치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우리 삶을 점령하여 다스린 기간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짧은 시간에 너무 깊게 침투당해서 이들에게 중독되어 있는지조차도 인식하지 못한다. 더욱 강렬한 자극 추구와 퇴폐적 오락 등은 기본이고, 자동차 없는 명절이나 휴가 또한 생각하기 어려워한다. 중독은 이미 생활의 중심부에 와 있다. 우리의 두 번째 이름은 중독자다.

우리의 의식과 정신이 중독되었다는 것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 성공과 출세지향적 의식, 대단히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경제 중심적 사고,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추구되는 무지의 극치, 일거에 대박을 꿈꾸는 로또 정신, 돈과 자극과 행복과 성공을 가져다 준다고 설교하는 온갖 정보에 중독되어 있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자본주의 문명은 중독자를 양산하는 문명이고, 중독자들 위에서만 가능한 문명이며, 어떤 형태로든 폭력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석유에 중독된” 막장문명이다.

교회 안의 지독한 증독 증세

가톨릭교회로 눈을 돌려도 중독 증세는 만만치 않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이 전부터 존재하긴 했지만, 이 말이 아니더라도 중독증을 보여주는 징후는 허다하다. 가톨릭교회의 성직중심주의, 주교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 배타적 교리중심주의 등은 구태를 마치 진리처럼 껴안고 살면서 도무지 ‘번역’이나 ‘해석’이나 ‘창작’을 할 줄 모르는 남성 성직자들의 착각 중독증을 보여주는데, 이런 착각 중독에 빠져 사는 성직자들일수록 신심과 권위를 강조하며, 동시에 번지르르한 제복입기를 좋아한다. 예수께서 일찍이 지상의 누구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당부하셨거늘, 가톨릭의 성직자들은 모두 “아버지”로 불리고 있으니 듣는 “아버지”께서 어떤 심정일지 짐작이 안 간다.

한편 자본주의 중독과 결합하여 성속 양차원에서 중독의 절정을 보여주는 성직자들도 적지 않은데, 자가용을 타고 골프장으로 향하는 성직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다른 나라에서라면 모를까, 녹색에 대해 아주 기본적인 소양만 갖춘 이라면,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골프채를 쉽게 들 수 없을 것이다. 성직자가 자가용을 타고 골프채를 넣고 자랑스레 다니는 그러한 종교는 없어져도 좋다.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 골프와 신앙은 양립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이것은 마치 경제 성장과 생태주의가 양립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토건재벌을 비롯한 자본의 첨병들이 거룩한 산과 들을 마구 파헤쳐 만든 골프장에서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이란 도대체 어떤 하느님일 것인가? 그런 장소에서는 결코 찬양 노래를 불러서는 안 된다. 저 신랄한 저주의 시편들은 바로 그들에 대한 노래이리라.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지성인이라면 대세에 붙어서는 안된다고 하는데, 하물며 성직자라면 어떠해야 할 것인가? 이 나라와 교회는 그야말로 온통 “남의 나라 땅”이 되어가고 있다.

구원이 필요한 교회

그럼에도,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은 구원받아야 하며, 자본주의 문명은 구원받아야 한다. 세속 권력과 사회의 대세에 붙어서 살아남으려는 남성 성직자 중심의 권위주의적 교회는 구원받아야 한다. 억압하고 파문시키고 세속 정치인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권력을 추구하고 세력다툼을 일삼는 교회는 구원받아야 한다. 그러나 과연 누가, 또는 무엇이 우리의 구원을 매개해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과연 얼마나 타락했고 얼마나 오염되었기에 신앙인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이런 불경스런 질문을 하는 것인가?

중독된 인간과 중독된 문명의 유일한 해독제는 아마도 ‘자연’이라는 몸을 입은 하느님일 것이다. 자연은 성경 이상의 성경이며 육화된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 마저도 기꺼이 상품으로 만들어버린 지 오래됐다. 근래에 지리산 둘레길이니 제주도 올레길이니 하는 생태관광이 뜨고 있지만, 도대체 생태와 관광이 함께 조합될 수 있는 말인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중독된 인간은 자기가 가는 모든 여정을 상품으로 포장하는 비상한 재주를 지녔다. 허나 우리의 재주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우리는 태초에 먼지였고 결국 먼지로 돌아간다. 우리의 존재가 보잘것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자연 밖에 구원은 없다’고 말해야 하는 시대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강 창헌 (신앙인아카데미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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