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도 '거기에' 중독되었는가? | ||||||||||||
[우리신학 산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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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앞 작은 공원에는 “oo공원은 금연권장 공원입니다.”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현수막의 권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원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나는 담배 중독자다. 내 삶은 중독에 찌든 삶이다. 25년 넘게 담배를 피워왔고, 하루가 멀다하고 알코올을 들이키고 있다. 그동안 내 몸이 무지막지한 나를 받아들인 과정을 생각해볼 때 아직도 큰 탈이 없다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일이다. 내가 나의 몸에 대해왔던 태도를 고려한다면, 아무리 심각한 질병이 찾아오더라도 나는 고맙게 감수해야만 한다. 지금까지 큰 탈 없이 버텨준 몸에 백만 번 고맙다고 해도 충분치 않다는 것을 적어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알코올에 의지하여 벌인 그 숱한 작태들과 더불어, ‘청자’에서 ‘디스’에 이르기까지 나의 몸이 호흡하며 받아들인 엄청난 타르와 니코틴과 온갖 악성 화학물질들,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끼친 악영향과 아무렇게나 버린 꽁초들, 나의 탐욕으로 사라진 나무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으로 심란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죄의식이 곧바로 회심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독의 해악과 난점은, 알면서도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데 있다. 나쁘다는 것을 머리로 인식하고 죄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중독에서 벗어나기에는 나 자신 너무 무뎌지고 말았다. 죄의식은 나를 중독에서 해방시켜주지 못한다. 중독을 통해 온 몸에 각인된 독소는 제거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바로 일상의 생활방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중독'이란 감옥을 선택한다 어떤 중독 증세를 가지고 있든지 간에, 중독과 결별하기 위해서는 결국 일상의 생활방식을 전면적으로 재고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탈중독은 어떤 회심, 곧 의식의 전환 내지는 생활방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회심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라는 폭력적 중독
중독에는 알코올과 담배와 섹스와 마약과 도박만 있는 게 아니다. 물론 국가와 자본이 이러한 중독 산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자본의 하수꾼들이 소위 필수품이라고 우겨대는 텔레비전, 컴퓨터, 휴대전화, 세탁기, 냉장고 등에 이미 우리의 눈과 귀와 입과 몸을 맡겨버렸다. 그러나 사실 이런 상품들이 마치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우리 삶을 점령하여 다스린 기간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짧은 시간에 너무 깊게 침투당해서 이들에게 중독되어 있는지조차도 인식하지 못한다. 더욱 강렬한 자극 추구와 퇴폐적 오락 등은 기본이고, 자동차 없는 명절이나 휴가 또한 생각하기 어려워한다. 중독은 이미 생활의 중심부에 와 있다. 우리의 두 번째 이름은 중독자다. 우리의 의식과 정신이 중독되었다는 것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 성공과 출세지향적 의식, 대단히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경제 중심적 사고,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추구되는 무지의 극치, 일거에 대박을 꿈꾸는 로또 정신, 돈과 자극과 행복과 성공을 가져다 준다고 설교하는 온갖 정보에 중독되어 있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자본주의 문명은 중독자를 양산하는 문명이고, 중독자들 위에서만 가능한 문명이며, 어떤 형태로든 폭력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석유에 중독된” 막장문명이다. 교회 안의 지독한 증독 증세 한편 자본주의 중독과 결합하여 성속 양차원에서 중독의 절정을 보여주는 성직자들도 적지 않은데, 자가용을 타고 골프장으로 향하는 성직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다른 나라에서라면 모를까, 녹색에 대해 아주 기본적인 소양만 갖춘 이라면,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골프채를 쉽게 들 수 없을 것이다. 성직자가 자가용을 타고 골프채를 넣고 자랑스레 다니는 그러한 종교는 없어져도 좋다.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 골프와 신앙은 양립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이것은 마치 경제 성장과 생태주의가 양립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토건재벌을 비롯한 자본의 첨병들이 거룩한 산과 들을 마구 파헤쳐 만든 골프장에서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이란 도대체 어떤 하느님일 것인가? 그런 장소에서는 결코 찬양 노래를 불러서는 안 된다. 저 신랄한 저주의 시편들은 바로 그들에 대한 노래이리라.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지성인이라면 대세에 붙어서는 안된다고 하는데, 하물며 성직자라면 어떠해야 할 것인가? 이 나라와 교회는 그야말로 온통 “남의 나라 땅”이 되어가고 있다. 구원이 필요한 교회 중독된 인간은 자기가 가는 모든 여정을 상품으로 포장하는 비상한 재주를 지녔다. 허나 우리의 재주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우리는 태초에 먼지였고 결국 먼지로 돌아간다. 우리의 존재가 보잘것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자연 밖에 구원은 없다’고 말해야 하는 시대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강 창헌 (신앙인아카데미 사무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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