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2009년 9월 27일 연중 제26주일

도구 Ludovicus 2009. 9. 27. 19:22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9년 9월 27일 연중 제26주일

제1독서 민수기 11,25-29

그 무렵 25 주님께서 구름 속에서 내려오시어 모세와 말씀하시고, 그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 내시어 그 일흔 명의 원로들에게 내려 주셨다. 그 영이 그들에게 내려 머무르자 그들이 예언하였다. 그러나 다시는 예언하지 않았다.
26 그때에 두 사람이 진영에 남아 있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엘닷이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메닷이었다. 그런데 명단에 들어 있으면서 천막으로 나가지 않은 이 사람들에게도 영이 내려 머무르자, 그들이 진영에서 예언하였다.
27 한 소년이 달려와서, “엘닷과 메닷이 진영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고 모세에게 알렸다.
28 그러자 젊을 때부터 모세의 시종으로 일해 온,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였다.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
29 모세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제2독서 야고보서 5,1-6

1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2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3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4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5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6 그대들은 의인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들에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복음 마르코 9,38-43.45.47-48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며칠 전 병원에 입원 중인 인천교구 신부님을 방문했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셨거든요. 죽을 고비도 넘기면서 큰 수술도 두 차례나 하셨는데, 저는 며칠 전의 방문이 첫 번째 방문이었습니다. 가본다 가본다 하면서도 제 개인의 바쁨을 이유로 찾아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큰 수술로 인해서 핼쑥하면서도 어눌해진 말투를 들으며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힘들어할 때 같은 사제로써 함께하지 못했다는 미안함을 간직하게 되었지요.

제가 매일 묵상하는 내용은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매일의 강론 주요 주제도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제 자신의 모습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말로만 기도했던 저였고, 사랑하라는 말만 했던 저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나의 편안함은 너무나도 당연히 생각했던 저였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찾아주고 만져주는 것인데 그래야 고통을 함께 나눌 수가 있을 텐데, 저는 입으로만 하는 가장 편한 사랑을 쫓았던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다가왔을 때에 가장 힘이 되어주는 사람은 좋은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 말 없이 나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고, 아무 말 없이 나를 따뜻이 안아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나의 이웃에게 보여주기보다는 편하게 입으로만 해결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 요한이 묻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막지 마라.”라고 하시지요. 사실 예수님의 이름을 사칭해서 잘못된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체면에 손상을 갈 수 있겠지요. 그래서 말렸고 이 점을 예수님께 칭찬받으려 했는데, 오히려 “막지 마라.”고 하시니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요?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요한 사도의 시선과 예수님의 시선을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먼저 보았고, 요한은 스승과 자신들의 체면을 먼저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통한 방법이 아니더라도 병자들이 고통 속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르지 않아도 고통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괜찮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자기의 체면에 상관없이 고통과 시련 속에 있는 사람을 먼저 바라볼 수 있는 것, 그를 설득하기 보다는 먼저 이해하려는 것, 나의 편함이 먼저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힘들어하는 사람의 고통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것, 입으로만 외치는 사랑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극단적인 표현을 하시지요.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사랑에 반대되는 죄에 대해서는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렇게 극단적인 표현을 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죄와 얼마나 자주 타협하고 있었는지요?

진정한 사랑을 쫓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 그리고 많은 성인 성녀들이 보여주신 사랑을 쫓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행복해지는 비결은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다방면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버트런드 러셀)



행복한 생각이 행복한 말을 만든다(‘좋은 글’ 중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말과 행동을
지나치게 믿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말과 행동으로 옮긴다.

그러나 실제로 말과 행동은
훨씬 미묘하고 변하기 쉬운 것이다.

인간은 말과 행동으로 어렵지 않게
자신이 원하는 상태에 자신을 놓아둘 수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도 따지고 보면
말이나 행동에 의해 생겨난다.

한 사람의 상황을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만드는 말의 마력은 정말
헤아릴 수도 없는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말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말은 생각의 발현이다.

긍정적이고 행복한 말은
긍정적이고 행복한 생각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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