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2009년 8월 31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도구 Ludovicus 2009. 8. 31. 08:08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9년 8월 31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제1독서 1테살로니카 4,13-18

13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4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15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16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17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18 그러니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


복음 루카 4,16-30

그때에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얼마 전에 어떤 신부님의 차를 탔다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릅니다. 평소 조용하고 말수도 적으신 분이기에 운전도 조용히 그리고 조심조심 운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저의 생각과는 달리 너무 급하게 운전하시는 것입니다. 소위 관성의 법칙을 확실하게 느끼게 하는 운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소위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불리는 그 기준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운전면허 시험을 볼 때 100점 맞은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운전은 이론이 아니라 실기이기 때문입니다.

차량 사고를 한 번도 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하지만 운전면허를 땄지만 10년 동안 한 번도 자동차 근처에도 가지 않은 사람을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소위 장롱면허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사람에게 운전대를 맡기는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차량 사고의 유무로 판단하기란 옳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속을 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평균 시속 150Km 이상 달리는 것을 즐기는 스피드광을 그리고 커브 길에서도 속도를 줄이지는 않는 사람을 베스트 드라이버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또 이런 사람은 어떨까요? 끼어들기를 잘 하는 사람, 신호등을 습관적으로 지키지 않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서도 운전을 잘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법규를 제대로 준수하면서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운전이야말로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위기의 상황에서도 적절하게 잘 대처하면서 동승자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야 말로 베스트 드라이버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어떤 편법을 즐겨 쓰는 사람을 베스트 신앙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만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 참된 신앙인이 아닙니다. 성당에서만 열심히 기도하는 척하면서, 일상 삶 안에서는 전혀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올바른 신앙인이 아닙니다. 항상 어디서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법규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만이 베스트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시고 생활하셨던 나자렛입니다. 따라서 그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갓난 아기 때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어떤 분인지 쭉 보아왔습니다. 즉, 하느님의 아드님을 직접 그것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특별한 선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베스트 신앙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니까요.

의심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 이것만이 베스트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주변 환경이 나를 베스트 신앙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친구를 두었다고? 돈과 높은 명예를 갖추었다고? 아닙니다. 그 누구도 아닌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나만이 베스트 신앙인으로 만드는 가장 큰 조건입니다.



인생은 복잡하지 않다. 단지 우리 머릿속이 복잡할 뿐이다.(오스카 와일드)



윤리 방정식(이진경, ‘수학의 몽상’ 중에서)

어느 날 멀리 떨어져 살던 아들을 보기 위해 어머니가 상경했다. 오랜만에 만난 모자는 밤새 정다운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가 바쁜 삶을 사는 터라 이튿날 헤어져야 했다. 아들은 힘들게 사는 어머니를 생각해 월세를 내려고 찾아 둔 20만 원을 어머니 지갑에 몰래 넣어 드렸다. 배웅을 하고 돌아와 지갑에서 뜻하지 않은 돈을 발견하고 놀라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흐뭇해했다. 그런데 그는 책상에 펴 놓았던 책갈피에서 20만 원과 어머니의 편지를 발견했다.

“요즘 힘들지? 방 값 내는 데라도 보태거라.”

독일 작가 케스트너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다.

경제학적으로 보자면 아들과 어머니 모두 이득도 손해도 없는 교환을 한 셈이다. 그러나 케스트너는 이런 경제 방정식과 다른 ‘윤리 방정식’을 보여준다.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 20만 원을 썼고, 어머니가 준 20만 원이 생겼으니 40만 원의 이득이 있었다. 어머니 역시 아들을 위해 20만 원을 썼고 아들이 준 20만 원이 생겼으니 40만 원의 이득이 생겼다. 그러니 도합 80만 원의 순이득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 남을 위해 무언가를 할 때, 경제 방정식으로 나타나지 않는 순이득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는 케스트너의 윤리 방정식이 표시하는 숫자에다가 ‘함께 사는 기쁨’이라는 막대한 ‘이득’을 덤으로 준다.

출처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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