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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바위는 1886년(병인년)에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요한)의 14세 된 아들 명희(明熙)와 순교자 홍봉주(토마스)의 두 아들이 수장된 곳이다.
이 두 가정은 온 가족을 처형하거나 노비로 삼고 가산을 몰수하는 혹형을 받았는데, 이 두 어린 아들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당시의 관례대로 전주 감옥에 수감했다가 나이를 채워 전주천에 밀어 넣어 죽였다.
성 남종삼은 한국 교회사 안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정약용의 학통을 이은 남인계의 농학자(農學者)이며 충주 부사를 지낸 부친 남상교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22세 때인 1838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영해 현감(寧海縣監)을 지냈고 철종 때에 승지(承旨)가 되어 국왕을 보필했다. 고종 때에는 그의 학덕으로 말미암아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한 바 있다.
그는 러시아의 남침이 강화됨에 따라 야기된 국가적 위기에 직면해 당시 집권자인 흥선 대원군에게 프랑스 주교의 힘으로 프랑스, 영국 등과 조선이 동맹을 맺어 이를 제어하도록 건의한다. 이에 따라 그는 당시 국내에서 전교 활동을 하던 베르뇌 주교, 다블뤼 부주교 등과 흥선 대원군의 회동을 주선키로 했으나 때마침 두 주교의 지방 사목 여행으로 공교롭게도 이들에게 연락이 되기까지 수개월이 소요된다.
그 동안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대원군은 오히려 천주교 박해로 급전하게 되어 1866년 1백 년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억되는 병인박해를 벌이게 된다.
결국 서울 인근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연행된 남종삼 성인은 홍봉주, 이선이, 최형, 정의백, 전장운 및 베르뇌 주교, 다블뤼 부주교 등과 함께 문초를 당하고 그 해 정월 21일 홍봉주와 함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된다.
이어어 남종삼의 부친 남상교는 공주 진영으로, 장자인 남규희는 전주 진영으로 잡혀가 공주와 전주에서 각각 순교했고, 처 이소사와 차남 남명희 그리고 두 딸은 경상도 창녕으로 유배된다.
그 후 이소사 역시 창녕에서 순교하고, 당시 15세의 어린 나이에 붙잡혀 갔던 명희는 전주 감옥에 수감한 뒤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 이곳 초록 바위에서 전주천에 밀어 넣어 수장시킨 것이다.
바로 이 때 남종삼과 함께 러시아의 남침을 물리치는 방법은 프랑스, 영국과 조약을 맺는 길뿐임을 흥선 대원군에게 건의했던 홍봉주(토마스)의 아들도 남명희와 함께 초록 바위에서 순교한 것이다.
홍봉주는 충남 예산 출신으로 1866년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 홍낙민(洪樂民)의 손자이며 부친 홍제영 역시 기해박해로 순교한 바 있다. 모친 종소사(丁召史)는 초대 명도회장(明道會長)이며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정약종의 맏형인 약현의 딸로 기해박해 때 남편과 함께 순교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사진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