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1 독서(신명 4,32-34.39-40)는
유일신을 섬기는 오직 한 민족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신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 고대 근동지방에서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모든 권능을 가지고 계시면서
오직 이스라엘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는 늘 성실하게 지켜주실 것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느님께서 제시해주신 열 가지 계명을 잘 지키면서 하느님께 성실할 것을 권고합니다.
모세는 신화에 나타나는 근동지방의 다른 신들의 모습과는 달리
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신 분이시며,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해주신 분으로서
더 없이 위대하시면 자비하신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나이 산에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여러 가지 규정들과 열 가지 계명들을 지킬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늘 안전과 평화가 함께 할 것을 약속해주신다고 합니다.
제2 독서(로마 8,14-17)는
하느님의 이름이 성령으로, 아빠, 아버지로 나타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름이지만
모든 인간에게는 친숙한 이름,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면서 외치셨던(마르 14,36)
하느님의 이름,
곧 아빠,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하느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신약성경의 계시들 가운데
예수님의 죽음에 포함되는 핵심적인 계시로서
인간을 돌보시는 하느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종으로 부르시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시면서 당신과 동격이라고 올려주셨습니다(요한 15,15).
그러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조건은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이어야 가능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던 예수님의 정신대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새롭게 태어나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은 올바른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은
하느님을 더욱 더 사랑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아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므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상속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의 삶을 봉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세례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의 품으로 들어갔지만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단지 세례를 받았다고
은총의 지위에 들어가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나누시는 사랑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께서 나누시는 사랑에 참여하기 원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는 우리의 몫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단지 작은 수고를 했기 때문에 바라는
보상의 원리에 따라
하느님의 영광을 차지하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는 사랑의 삶으로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마태 28,16-20)은
일찍부터 하느님을 삼위일체이신 분으로 고백했음을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역사적으로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찍부터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선포가 힘차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주며,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갈릴래아는
이제 이방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 되었고(마태 4,15),
세례성사의 예식이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초기교회에서 세례성사의 예식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갈라 3,27; 1코린 6,11).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의 지방(시리아)에서는
아주 일찍부터(80년 전후로)
이미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기 시작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4세기에 믿을 교리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이 없지만
오늘 복음에서처럼
초대교회는 일찍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면서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셋이지만 하나의 실체,
하나의 본성을 지니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 역시
우리가 미사 시작에서 반복하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2코린 13,13)라고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코린토 교우들에게 인사를 전합니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를 돌보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하느님께서는
제1 원리이시고 기원이신 성부로서 ‘만물 위에 계시고’
말씀이신 성자를 통하여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성령 안에서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 4,6)”
(아타나시오, 세라피온에게 보낸 편지, 1,28)라고 일찍부터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삼위일체는
우리 인간의 머리로는 제대로 알아듣기가 힘든 교리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로마 11,33-34)라고 외칩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려고 애를 쓰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어느 날 바닷가에서
모래성에 물을 길어다 붓는 어린아이를 보고 왜 그러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아이는 바닷물을 말리려고 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때서야
자기가 그토록 심오한 신비를 설명하려는 것이
마치 바닷물을 모래성에 퍼부어 말리려는 어린이아와 같은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하여
단지 유비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이는 한 가족입니다.
그러나
그 한 가족에게 사랑이 존재할 때, 즉 사랑을 나눌 때에만
하나로 존재할 수 있고,
사랑을 나눌 때에만 한 가족이라고 당당하게 부를 수 있습니다.
가족을 하나로 묶어주고,
한 가족이라고 당당하게 부를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사랑이듯이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사랑”(에페 3,19)으로 결속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도
하나의 실체,
하나의 본성을 지니신 하느님이십니다.
형광등이든 백열등이든
제대로 기능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먼저 전기력(전력: 아버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네온이나 필라멘트(아들)가 있어야 하고,
여기서 발산하는 빛(성령)이 있어야 합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전기의 힘이 제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등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렇듯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어떤 한 위께서 모든 것을 독점하지 않으시고, 함께 역할을 나누십니다.
이름은 다를지라도
이렇게 나눔에서도 같은 능력을 발휘하시고
하나를 지향하시는 하나이시며,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전기력이 필라멘트를 통하여 빛을 발산하는 것은
오직 세상을 비추고 우리를 위한 것이듯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의 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성부께서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완전한 창조력과 완전한 활동력을 똑 같이 지니고 계신다는 신비입니다.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사랑과 성령의 사랑이
똑같이 뜨거운 사랑이라는 신비,
오직 인간을 돌보시려는 뜨거운 사랑의 신비입니다.
아빠, 아버지이신 하느님 이외에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다르게 보입니다.
올바른 신앙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고,
성령께서 우리의 희망이시라고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의 영광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고통과 시련을 희망으로 바꿀 줄 압니다.
또 그렇게 우리를 바꾸어주시는 분은
사랑의 원천인 성령이시며,
그분께서 이끌어주시기 때문에 우리 삶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어주시는 성령을 찬미하는
삼위일체 대축일의 핵심 의미는
우리가 각기 다르지만 같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단순히 신앙을 고백하는 것만 아니라
우리가 사랑할 때 같은 하느님을 믿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되새기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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