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순교자 103위 성인(Sts. 103 Martyres Coreae) - 문학진토마
축일: 9월20일
성 안드레아 김대건과 성 바울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 대축일
Santi Andrea Kim Taegon, Paolo Chong Hasang e compagni Martiri coreani
한국에는 18세기 말경에 처음으로 몇몇 평신도들의 노력으로 그리스도 신앙이 들어왔다.
1784년 북경에서 영세한 첫 한국인 이 귀국하기 전에 이미 공동체를 형성하고 신앙을 실천하였으니 이는 교회사에 전무 후무한 일이다.
초기부터 신자들은 모진 박해를 겪어야 했고 박해는 100년 이상 계속되어 만 명 이상의 순교자를 냈다.
초기 50년간에는 중국인 사제 두 분의 짧은 사목 활동이 있었을 뿐 1836년에 프랑스에서 선교사들이 몰래 입국할 때까지는
사목자 없이 평신도들만이 용감하고 열심한 신자 공동체를 지도하고 길러 냈었다.
이 공동체 속에서 1839년, 1846년, 1866년 박해 때 순교한 103명이 성인 반열에 들게 되었다.
그들 중 열심한 사목자였던 최초의 사제 안드레아 김대건과 훌륭한 평신도 바울로 정하상이 대표적 인물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지 가톨릭 신앙이 전파된 것을 보면 대개 선교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성령의 힘은 성실한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 생활하고자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한다.
극동 아시아의 조그마한 반도인 조선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것은
성실한 유학자들이 서적을 통해 학문을 연구한 끝에 스스로 입교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온 세상에 당신 성령의 힘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의 섭리일 것이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 한문으로 쓴 성서와 교리서
또는 윤리와 신학 서적들이 그 당시의 외교 관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다른 많은 종교 서적들과 함께 읽히던 천주 교회 서적들은 진리를 찾던 조선의 선량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이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권철신과 이벽을 중심으로 한 젊은 양반 학자들의 학문적인 모임이었던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가 1779년경에는 천주교 신앙을 알고 실천하려는 모임이 되었다.<br>
1783년, 이승훈을 북경으로 파견하여 북경 선교사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게 하였으며,
그 이듬해 이승훈이 귀국하여 이벽, 권일신, 정약용, 약종 형제들과 함께 첫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다.
성직자나 선교사가 없이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인 조선의 신앙 공동체는 급속도로 성장하였으나 정치적 불안과 당파 싸움 및
교리와 마찰을 일으킨 조선의 풍속 때문에 심한 박해를 받았다.
1785년, 형조의 우연한 검거에 의해 야기된 최초의 박해에 이어 크고 작은 박해들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수천 수만 명이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신자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1793년에 조선에 들어온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1801년에 대부분의 교회 창설자들과 함께 순교했다.
목자 없는 조선의 신앙 공동체는 1825년, 로마 교황청에까지 그 어려움을 호소하여
1831년에는 조선 교구가 설정되고 파리 외방 선교회가 이 지방의 선교를 담당하게 되어
1835년부터 몇 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들어와서 활동했으나 1839년에는 주교 한 사람과 사제 두 사람이 모두 순교했다.
1845년에는 이 땅에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잠깐 활동했으나 그 다음해에 순교했다.
서구 열강들이 극동 지방에서 세력 다툼을 벌이던 19세기 말에는 국내외의 불안이 고조되고 쇄국 정책으로 1866년,
외국 성직자들이 선교 활동을 하던 천주 교회에 다시 끔찍한 박해가 일어나 1만여 명의 신자들이 학살되고 십여 명의 성직자들이 모두 살해되거나 추방되었다.
이렇게 100여 년에 걸친 박해로 적지 않은 신자들이 배교하기도 했으나 학자와 남자들 뿐 아니라
부녀자와 아이들 및 평민과 상인들까지도 신앙을 위하여 용감하게 목숨을 바쳤다.
이 중에서 초기의 순교자들은 자료의 미비로 누락되고
1839년부터 1849년까지의 순교자들 중에서 79명이 선택되어 1925년 7월 5일 복자품에 오르게 되었고,
다시 1866년의 박해를 중심으로 순교한 24명이 1968년 10월 6일에 시복되어 모두 103명의 순교자가 시복되기에 이르렀다.
이 103명의 순교 복자들은 한국 선교 200주년이 되는 198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에서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신자들이 강요받은 것은 주로 세 가지였다.
첫째는 배교할 것,
둘째는 신자들의 성명과 주소를 댈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회 서적과 성물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이에 불복하면 참혹한 형벌을 가했는데 손과 발, 다리에 주리를 틀며 끈으로 살을 톱질하여 베어 내고 치도곤이나 곤장으로 때리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몇 차례의 매를 맞으면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며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다가 기절하면 감옥에 처넣어 두는데 그 감옥이란 통나무로 된 움집 같은 것이라서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둡고 음산하며 바닥은 습기로 가득 차
신자들의 매맞는 상처는 곪고 썩어 구더기가 생길 지경이었고,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아 굶주림에 지쳐 어떤 사람들은 거적때기를 뜯어서 씹고 있을 정도였다.
많은 신자가 이렇게 비참하게 옥사했는데, 차라리 교수형이나 참수형을 받는 것이 오히려 고통을 덜 받는 편이었다.
많은 신자들은 이 같은 혹독한 심문과 매질 그리고 감옥 생활에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며 때로는 심문 중에
창조주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유교의 부모 공경과 임금에 대한 충성심에 비교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설파하다가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우리는 신앙 생활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만을 빌며 무사안일한 생활을 꿈꾸기 쉽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과 투쟁하며 복음의 메시지에 따라 살아가려면 비록 박해 시대가 아니더라도 갖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고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을 생각하며 구원의 길을 용감하게 걸어간 순교자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 생활이 무사 안일하기만을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은 우리를 이 세상의 모든 악과 불행에서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어려움을 당함으로써 이 세상의 죄악과 불행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 순교성인들의 진리에 대한 갈망과 순교 정신은 현대 사회의 부조리와 무사 안일주의에 좋은 귀감이 될 것이다.

1877년에 서울의 감옥에 갇혔던 리델 주교는 옥중 생활의 비참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기아로 희생이 된 그들을 보고 너무나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들은 사람이라기보다는 해골이 걸어다니고 있는 것이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괴로움과 굶주림과 가려움과 곪아 썩어 가는 상처는 그들을 볼 수 없을 만큼 흉악한 모습으로 바꿔 놓았다."
1845년에 입국한 다블뤼(Daveluy)신부는 기해년의 옥중 생활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교우들은 이러한 감옥 속에 빽빽이 처넣어져 있었으므로 발을 뻗고 누울 수도 없을 정도이다.
그들이 소리를 같이하여 말하는 바에 의하면, 이 지굿지굿한 옥중의 괴로움에 비하면 고문은 문제도 안된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고름 때문에 멍석은 푹푹 썩어 가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게 되니, 이로 말미암아 고약한 병이 돌기 시작하여 2,3일내에 죽은 교우도 몇이나 있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형벌은 굶주림과 목마름이었다. 고문하는 곳 에서는 용감히 그 신앙을 공표하면서도 이 기갈을 참지 못하여 굴복한 이도 적지 않았다."
(류홍렬, ’한국 천주 교회사’ 상권 p.318-319)

성 바울로 정하상의 「상재상서」에서
(정하상의 상재상서에서, 김남수 주교 편역)
종교도 어디서 왔거나 진정 거룩한 종교라면 어찌 이 나라 저 나라의 경계가 있겠습니까
천주께서 천지 만물을 만드신 목적은 우리에게 당신의 복을 내려 주시고, 당신의 착하심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늘을 만드시어 우리를 덮어 주시고 땅을 만드시어 그 위에 우리를 살게 하시고,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시어 우리를 비추시고 초목과 금수와 금은동철을 우리가 향유하고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모태에서 태어나 장성할 때까지 가지가지 은혜가 이와 같이 한이 없으니. 인간의 마땅한 본분은 과연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만일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밟고 살면서 먹고 입기만 한다면 인류를 내신 분의 은덕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 아버지가 집을 짓고 살림을 차려 아들에게 주어 쓰게 하였는데도 아들이 그 집에 살며 그 살림을 사용하면서도 제가 잘난 체하고,
부모를 섬기며 그 은덕에 보답할 도리와 근본을 모른다면 어찌 효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불효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티끌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주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를 내시고 기르시고 돌보시며 인도하십니다.
굳이 죽은 후에 받을 상을 말하지 않더라도 당장 지금 받고 있는 은혜가 극진하여 그분을 받들어 섬긴들 어찌 만 분의 일이나 보답한다 하겠습니까?
천주를 섬기는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려니와 은밀한 말을 들추어내거나 괴상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스스로의 잘못을 고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천주의 계명을 지키려는 것뿐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길다 해도 백 년을 넘기지 못하는데 자기 이익만을 탐하여 얻지 못할 것을 얻으려 애쓰고
이미 얻은 것을 잃지 않으려 걱정하는 사이에 어느덧 늙고 만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몸이 한 번 죽으면 부귀 공명도 반드시 허무로 돌아가고 맙미다.
부귀 공명마저 일평생 애써도 얻지 못하는 것인데 이 헛된 꿈을 깨기가 그다지 어렵단 말입니까?
세상에 있을 때에 정신이 흐려져 깨닫지 못하다가 육신이 죽은 뒤에 뉘우친다 해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기에 목을 벨 도끼가 눈앞에 있고 몸을 삶을 가마솥이 제 뒤에 있어도 꿋꿋이 굽히지 않은 사람이 대대에 적지 않습니다.
이것도 참된 종교의 증거입니다.
교리의 참되고 거짓됨이나 사리의 바르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얼토당토 아니한 말로써 공격하고 배척하고 있으니,
그저 외국의 종교라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금은 산지를 가리지 않고 순금이면 보배가 아니겠습니까?
종교도 어디서 왔거나 진정 거룩한 종교라면 어찌 이 나라 저 나라의 경계가 있겠습니까?
수명을 감하고 바쳐서 천주교의 참됨을 증거하고 천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몸도 장차는 죽을 목숨이오니, 감히 말해야 할 이 시각을 만나 한 번 머리를 들고 길게 외치지 못하고 슬프게도 입을 다물고 죽어 버린다면
산같이 쌓인 회한을 장차 백 대 후세에 이르기까지 폭로할 길 없기에, 엎드려 청하오니,
지금 한 번 밝은 빛으로 굽어보시고, 도리가 참된지 거짓인지, 올바른지 그 릇된지 자세히 판단한 다음,
위로는 정부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일변하여 바른길로 돌아와, 금명을 풀고 체포하는 법을 거두며,
옥에 갇힌 사람들을 석방하고 온 백성이 모두 제 고향에 돌아가제 직업을 즐기면서 함께 평화를 누리게 해주시기를 천번 만번 바라고 또 바랍니다.

성 바오로 정하상 ST.PAUL CHONG HASANG (1795∼1839)
성 바울로 정하상(丁夏祥)은 순교자인 정약종 아우구스띠노와 유세실리아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기도와 교리를 배워 깊은 신앙을 가졌으며, 한국천주교회 초기 평신도 지도자였다.
신유박해 때 부친과 친형 정철상가롤로(哲祥)가 1801년순교하자 나이 7세인 정하상은
누이동생 정혜와 어머니를 모시고 마재(馬재:경기도 양주군)의 큰 댁으로 내려왔다.
정하상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기도와 교리를 배웠다. 어머니 유체칠리아는 1839년 11월에 순교하였다.
20세에 서울로 올라와 목자 없는 조선교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교회 재건을 모색하였다.
조증이 바르바라 집에 머물면서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였고,
교리와 학문을 철저하게 익히기 위하여 함경도에 귀양 중에 있던 조동섬 유스티노에게 찾아가 수년간 학덕을 연마하기도 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흩어진 신자들을 찾아 신앙의 열기를 북돋우면서
북경에 가서 영세와 견진과 성체를 받고 주교에게 성직자 한분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였다.
1823년부터는 국내 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의 일을 보면서,
유진길, 조신철 그리고 강진에 유배 가 있는 삼촌 정약용의 자문과 후원으로 끊임없이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로마 교황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한편, 북경 주교에게도 서신 등을 보냄으로써
마침내 조선교회가 빠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고,1831년 9월9일 자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 독립교구가 설정되었다.
성직자 영입에 지속적인 노력으로 유방제 신부와 샤스탕 신부를 비밀리에 모셨고,
1837년에는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를 모셨다.
앵베르 주교는 학식과 덕망이 있는 정하상 바오로가 사제가 되기에 적당하다고 여겨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던 중,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주교를 피신시키고 순교의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때 그는 체포될 경우를 대비하여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작성했는데, 이것은 한국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이며,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박해를 중단시켜야 할 이유와 주장을 밝힌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이 글에서 박해의 부당성을 뛰어난 문장으로 논박했기 때문에 조정에서까지 이 글에 대하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1839년 7월11일 포도청에 압송되어 배교와 샤스땅신부와 모방신부의 은신처를 대라는 고문을 당했으나 입을 열지 않았고,
두 신부가 자수한 다음 또 심문을 받고 세 차례의 고문을 받았다.
온갖 고통을 강인하게 참아 나간 모범을 보여 평신도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여유있게 나타내었다. 자신의 믿음을 순교로써 실증하였다.
피를 쏟는 형벌에도 태연자약하였고,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가면서도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지녔다고 하니 신앙을 생활화한 산 표본이라 하겠다.
이리하여 1839년 9월22일, 서양신을 나라에 끌어들인 모반죄와 부도의 죄명으로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니, 그의 나이 45세였다

한국 순교자 103위 성인,Sts. 103 Martyres Coreae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천주교의 전파는 보통 사제들이나 선교사의힘으로 이루어졌는데, 우리나라는 그것과는 달리 한 권의 교리서가 그 인연이 되었던 것이다.
즉 학자 이 덕조(李德祚=이벽)가 중국에서 여러 가지 서적을 구입한 가운데 가톨릭 교리의 설명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가 한 권 있었다.
그는 신기하게 여겨 죽시 그 책을 읽고서 깊은 감명을 느끼고 곧 친구들과 상의하고 북경에 있는 대주교께 연락하여 문통(文通)으로서 연구를 계속하고,
1783년 12월에는 이승훈(李承薰)이 먼저 세례를 받고 그 본명을 베드로라 했으며, 이어서 다른 사람들도 다 영세 입교 했다.
이리하여 천주교는 신부도 없이 서로서로 전파되어 신자 수 4천 명에 이르렀다.
신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그들은 북경에 있는 대주교께 사람으 보내어 신부를 파견해 줄 것을 간청했다.
이리하여 1793년 2월에 비로소 한국의 초대 신부로 중국인 주 문모(周文謨, 야고보)라는 이가 내한하여 신자들을 잘 다스렸다.
그러나 그는 1801년에 일어난 한국 최초의 박해 때 일찍이 순교하고 말았다.
그래서 신자들은 1825년 다시 로마에 계시는 교황 레오12세께 서한을 보내어 신부를 요청했던 바, 역시 중국인 유(劉)파치피코 신부가 내한했으며,
그 후 파리의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가 한국 천주교회를 담당하게 되자 교회는 일약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런데 정부는 다시 금교령(禁敎令)을 내려 교회를 박해했다. 이 박해때에 물론 배교하는 자도 수명 있었으나,
대부분은 모든 고통을 하느님을 위해 잘 참고 훌륭히 신앙을 지키며 순교했다.
이러하여 1839년부터 1849년까지의 순교자들 중 79명이 선택되어 1925년 7월 5일에 복자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 후
다시 1984년 5월 6일에 성인품에 올랐으나 이들은 우리나라 천주교에 혜성과 같이 광휘를 발하는 분들이다.
그 중에 성직자로서는 범세형 라우렌시오 앵베르 주교, 나 베드로 모방 신부, 정 야고보 샤스탕 신부, 김대건(金大建)안드레아 신부 4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75명은 다 평신도이며 신문 교우요, 또 특기할 것은 그 대부분이 연약한 부녀자 였다는 점이다.
그들의 신분은 여러 층이어서 위로는 귀족 양반으로부터 관리학자, 궁중의 시녀와 또한 귀여운 소년 소녀도 끼어 있다.
범 앵베르주교를 비롯하여 나 모방 신부, 정 샤스탕 신부 등 프랑스인 성직자들은 1836년에서 37년 사이에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박해의 나라인 줄 알고 부임했던 그들은 이미 생명을 바치기르 각오한 것은 물론이다.
그들은 공공현히 성무를 집행할 수 없게 되자 은신하여 몰래 신자들을 찾아가 성사를 주며 전국을 순회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신자뿐 아니라 외인들과 관헌들까지도 이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이곳 저곳에서 하루 이틀 묵는 관계로 쉽게 거처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관리는 계교를 꾸며 서울에 있는 냉담자인 김 여삼(金汝三)을 돈으로 매수하여 그를 시켜 주교의 행방을 찾게 했다.
물욕에 눈이 어두운 유다스 김여삼은 우선 주교의 은신처와 다른 두 신부의 거처도 탐지하여 관가에 밀고했으므로 두 분은 즉시 체포되었다.
이들은 여러 재판소에 끌려나가 잔학한 관리들의 무도한 고문을 받고 마침내 1839년 9월 21일에 서울 부근의 새남터에서 용감히 참수 순교했다.
그 유해는 근처에 있는 노고산(老姑山)에 매장했다가 후에 삼성산(三聖山)이란 곳에 이장했다.
이 세 분은, 한국인 신부가 교회를 다스리게 되면 박해를 멈출 것이라 생각하고 독실한 소년 세 명을 선택하여 중국에 있는 마카오에 보내어 신학을 공부하게 했다.
그 중 한명은 공부 도중에 병에 걸려 사망사고 안드레아 김대건은 초대의 한국인 신부로서 활약하다가 영광의 순교를 했다.
그 부친 김제준(金濟俊)이냐시오도 1839년 9월 26일에 참수 순교하여 성인이 되었다.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는 귀국 후 숨어서 전교하다가 얼마 안 되어 관리에 발각 되었다.
배교를 강요당하며 고문을 받자 그는 용감하게도 관리들에게 교리를 설명하며 그들의 비법을 책하였던 바,
1846년 9월 26일 마침내 참수 순교하여 그 귀중한 생명을 하느님께 바쳤다.
그후 다시 거센 박해의 바람이 일었으니 대원군 집권기인 1866년부터 1871년까지 병인 박해가 그것이다.
이때의 박해로 말미암아 근 1만명에 가까운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었는데, 순교 성인 24위가 순교한 것은 1866년 병인 대 박해 때의 일이다.
병인 대 박해의 첫 희생자는 평양교우 유정률 베드로였다.
이 박해가 서울에까지 번지면서 교회 서적 간행에 힘을 기울이니 최형 베드로와 전장운 요한, 이선이 등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2월 23일에는 배교한 이선이의 밀고로 시메온 베르뇌 장주교와 홍봉주가 잡혔고 25일에는 남종삼 요한을 잡아들이라는 명이 내려졌다.
바로 이날 유스토 브르트니에르 백신부와 우세영 알렉시오, 정의배 마르코 등이 잡혔다.
이렇게 시작된 박해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서 시작된 지 한 달도 채 안되어 위에서 말한 주교와 신부 외에도 헨리코 도리 김신부,
루가 위앵 민신부, 볼리외 루도비코 서신부, 안토니오 다블뤼 안주교, 베드로 오매트로 오신부 등이 계속해 잡혀들었다. 이들은 모두 3월 30일까지 참수 순교했다.
이들과 함께 홍봉주 토마스, 남종삼 요한,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 황석두 루가 등 많은 교유들도 순교했다.
이렇게 해서 박해는 일단락 되었으나 다시 그해 말에 박해가 전국적으로 재개되면서 성인품에 오른 조화서 베드로, 조원호 요셉 부자 등 많은 교우들이 순교했다.
이 거룩한 순교자들의 피로 오늘의 한국 교회가 자라왔고 또 앞으로도 더욱 튼튼히 자라가게 될 것이다.

4대 박해-가톨릭대사전에서
1.신해박해.辛亥迫害.1791년.윤지충 사건
1791년(辛亥, 正祖 15년)에 있었던 박해.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尹持忠)과 그의 외종사촌 권상연(權尙然)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神主)를 불태운 이른바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인해 발생하였다.
12월 8일(음 11월 13일)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되고, 이승훈은 배교했음에도 불구하고 면직되고, 권일신은 유배가는 도중 사망하고,
그외의 교우들은 배교하고 석방됨으로써 박해는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 서학서의 구입이 금지되고 또 이미 들여온 홍문관(홍문과)의 서학서도 불 태워지는 등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2.신유박해.莘酉迫害.1801년.
1801년(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 1800년(정조 24년) 6월(음) 천주교에 대한 비교적 온화한 정책을 써왔던 정조가 승하하자,
모든 정세는 천주교와 남인에게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順祖)가 겨우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고,
대왕대비(大王大妃)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는 섭정이 되어 모든 정사를 마음대로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왕대비는 원래가 노론벽파(老論僻派)에 속해 있었으므로, 집권하게 되자 천주교도들과 남인 시파(詩派)를 일망타진하려 하였다.
신유박해로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거의 사라졌을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교인들도 유배를 당했거나
생명유지를 위해 산가벽지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어 거의 빈사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천주교회 는 그 후에도 전국적인 규모는 아닐지라도 크고 작은 박해를 끊임없이 받으면서,
신앙을 굳게 지켜나갔고, 선교사를 다시 영입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3.기해박해. 1839년☆기해박해의 순교자들과 한국 천주교회 초기의 모습 ☆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839년(헌종 5년)에 이르러 다시 시작되었다. 1839년이 기해년이었기에,이 때의 박해를 흔히 기해박해라 한다
기해박해 때에는 조선에 들어와 활약하던 앵배르(Imbert)주교와 모방(Maubant)신부 샤스탕(Chastan) 신부 등
3명의 불란서 선교사와 더불어 모두 114명 이상의 신자가 순교를 하였다.
기해년의 박해가 일어나자 앵배르 주교는 순교자들의 사적을 기록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신도 곧 체포될 것을 예감하고
그는 정하상과 현석문에게 순교자의 사적을 면밀히 조사하여 기록하는 일을 계속하도록 명하였다.
이 일을 부탁받았던 정하상은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현석문은 숨어 다니며 교우들로부터 모아들인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자료를 정리하고 기록하여 {기해일기}란 책을 완성하였다.
이 {기해일기}는 한동안 실전되었다가,
1904년경 당시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뮤텔(Mutel)주교에 의해 한글본이 발견되어 이듬해인 1905년에 그대로 출판되었다.
이 {기해일기}에 의하면 당시에 순교한 사람이 모두 114명이 넘었다고 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78명의 순교사기만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해일기}는 그 사료적인 정확성이 입증되어 여기에 기록된 78명 가운데 69명이 1925년 7월 5일에 복자위에 올랐으며,
이들은 1984년에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순교자연구소www.rimartyrs.pe.kr에서
4.병인박해.丙寅迫害.1866년-1873년
조선조 말기인 1866년(高宗 3년)에 시작되어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계속되었던 박해를 말한다.
피로 얼룩진 한국 교회사를 통해서도 병인박해는 그 규모와 가혹함과 희생자의 수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박해였다.
이 박해의 주요 원인은 유교사상에 젖은 보수지배충의 서학(西學)에 대한 사갈시(蛇蝎視), 즉 천주교에 대한 이교도들의 증오심에서 발작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척사(斥邪)를 요구한 박해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윤리 도덕을 무시하고, 아비와 임금도 안중에 없으며 죽음을 가장 영광스럽게 여기는 족속으로,
재물을 가지고 사람을 유인한다"고 하여, 동양윤리의 이단자요 모든 악의 전형으로 몰았다.
위정자들은 또 신유년(辛酉年, 1801년)의 이른바 황사영 백서(黃飼永帛書) 사건을, 한 교인의 생각이 아니고 프랑스의 군사력을 끌어들이는 것은
천주교의 신조인 것처럼 몰아세워 보수적인 배외사상(排外思想)을 부추기는데 이용하였다
출처 : 언제나 처음처럼
글쓴이 : 즐거운 삶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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