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와서 그대여, 이름 있음을 부끄러워하라.
- 한수산 성지 순례기 『길에서 살고 길에서 죽다』중에서 옮김 -
※ 사진은 [성지순례사진및 순례기] 방에서 [필구 아오스딩]님의 사진입니다.
해미성을 다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그러나 나는 그 아름다운
성벽을 바라보는 기쁨이 하나씩 비통함으로 바뀌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찾아간 한밤의 해미성 앞에서 그 통한의 절망이
다시 뜨거운 믿음이 되어 솟아오르는 희망의 체험을 했다. 그렇게
해서 '무명 순교자의 묘역 해미'는 나에게 자랑스러움으로 각인되었다.
천주교 신자가 되었음을 나는 해미가 있기에 더욱 감사해했다. 해미가
있기에 나는 이제부터 내 믿음 안에서 얼마든지 덜 외로워 할 것 같았다.
해미는 이제 내 안에 있으므로.
단순화하자면, 순교자란 진리를 죽음으로 증거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미는 개인의 종교적 입장을 떠나 '순교자의 거룩함'만으로라도
기리며 지켜가야 할 도시이다.천주교 신자에게 있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해미 읍내와 그 주변은 하나의 성도(聖都)다. 다만 이 엄청난 가치에도 불구
하고 그것을 가꾸며 드러내고 있지 못함이 안타깝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자들이 죽음으로 하느님을 증거하며 스러져 간 이 땅에 와서
누가 고개 숙여 눈물짓지 않고, 통한의 성벽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떨리지
않을 수 있으랴.
흔히 '해뫼'라고 불리웠던 해미에 와서,읍내로 들어서면 쉽게 만날 수 있는
해미성은 참으로 격조 높다.이순신 장군이 몇 달 근무한 적도 있는 사적
116호 해미성은 조선 시대 읍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한국인의 미의식이나 유장한 정서가 차가운 돌성에 어떻게 이토록 부드럽게
녹아서 스며들 수 있었는지, 감격스럽다. 동북쪽의 낮은 구릉을 의지하며
화강암으로 쌓아 올린 성벽. 돌의 크기는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진다.
무심하게 쌓아 올린 듯한 그러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무질서의 조화 같은
것이 놀랍고 눈부시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성벽 안에서 얼마나 참담한 일이 벌어졌던가. 성문을
들어서면 안은 텅 비어 있다. 놀러 나온 사람들을 위해 세웠을 그네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을 뿐 성안은 폐허에 가깝다. 오른쪽 성벽을 따라 대나무 숲
이 울창했다고 하나 그것마저도 지금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서 무심히 지나치려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회화나무(일명 호야나무)다. 핏물이 들어 역사를 증언하는 나무다.
성안에 있는 '천주교 순교 기념비'의 비문을 따라 그 비극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해미 읍성은 조선 태종 18년 덕산의 병마절도사를 옮긴 후 축조한 석성이다.
효종 2년 호서좌영(湖西左營)을 설치, 군영이 되었다. 이때부터 호서 내포
지방의 국사범들이 이곳으로 호송되기에 이른다.
정조 15년(1892년) 사헌부의 계언(戒言)에 의해 '서산군(당시는 군이었다)
의 양반들이 천주학을 전수하여 윤리에 어긋나는 언행이 다분하니 엄중히
다스려 서학의 뿌리를 뽑게 하라.' 하여,신자들이 배교를 강요당한다.
이렇게 해서 수많은 신자들의 고통과 피가 이곳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잡혀온 신자들의 주리를 틀고, 돌로 내려치고, 목을 베는가 하면, 끌고
나가 서문 밖 돌다리 위에 사지를 들어 메쳐, 가슴이 터지고 머리가
부서진 청혈(청혈)이 흘러 바다 어귀 십 리에 이르렀다.그렇게 해서
병인, 무진박해(1866-1868년)동안에만도 천여 명이 순교했다.
순교 기념비 옆으로 회화나무 한 그루가 쓰러질 듯 서 있다. 옛날 감옥
앞에 서 있던 것이다. 300년 된 나무로 여기에 신자들을 묶어 고문했던
흔적으로 아직도 철사줄이 박혀 있다.
1975년 보호수로 지정된 이 나무는 1989년 썩은 부분을 도려 내고 그 해
가을에는 씨앗을 받아 후계 나무를 키워 냈는데, 지금 주변에 자라고
있는 게 바로 그 나무라고 한다.
회화나무 뒤편 옛 감?자리도 빈터이기는 마찬가지다. 감옥 두 채가 있
었으나 일제 시대에 헐렸다는 것이다. 바로 이 감옥에서 김대건 성인의
증조부 김진후(비오)가 10여 년의 옥고 끝에, 숨을 거두었다.
1950년대에 해미공소 신자들은 식량을 절약하여 감옥터 1,800여 평을
확보하고 공소 강당을 세웠었다. 그러나 1982년 문화재 관리를 명목으로
당국에서 공소 강당을 철거하며 겨우 순교 기념비만을 세울 수 있게 했다.
이때 약속된 복원계획은 무산된 채 교회의 성역화 사업도 허락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성벽을 왼쪽으로 돌아 나가면 서문인 지석루 앞에 쇠막대기와 철망으로
닭장처럼 둘러쳐진 순교 성지가 있다. 이곳은 부정한 것은 서쪽 문으로
내다 버린다는 미신에 따라 신자들을 서문 밖으로 끌어내어 처형했던
자리이다.
신자들은 이 문으로 글려 나가며 배교의 표시로 성물(聖物)을 모욕하도록
강요당하였다. 일본의 박해 시대에도 그런 것이 있었다. '후미에'라고
해서 성화를 발로 밟도록 해서, 그것을 밟으면 배교한 것으로 보고
신자들을 방면했었다.
둥글고 거칠게 다듬어진 돌에 한글로 '순교 현양비'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 위에 놓인 십자가가 이곳에서 죽어 간 신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의
무거움을 대신하듯 투박하고 묵묵하다.
그 옆에 다시 또 철망에 갇혀 있는 커다란 돌이 하나 있다. 이곳 전체는
철망으로 막혀 있으나 문을 열어 놓아 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다. 그러나
가운데 이 돌을 둘러싼 또 하나의 철망은 열쇠로 잠겨있다.
이 돌에는 어쩌자는 것인지 철망으로 지붕까지 만들었다.
서문 밖 개울 위에 있던 그 돌이다. 신자의 몸을 들어올렸다가 돌 위에
내려쳐서(자리개질) 죽였던, 돌이다. 머리가 터지고 가슴이 부서지며
죽어 갔을 순교자들의 비명 소리. 그들이 흘린 죄없는 피...
참담한 마음으로 철망 속에 갇힌 돌을 바라본다.
입술이 떨리는 잔혹의 극치다. 해미성 안의 회화나무에 매달고, 목 잘라
죽이고, 목매달아 죽이고, 돌 위에 들어 메쳐 죽이고, 사람을 줍혀 놓고
돌을 떨어뜨려 죽이고, 그래도 살아서 꿈틀대는 몸뚱어리는 횃불로 눈알
을 지지고, 병든 몸 굶겨 죽이고, 엄동네 내몰아 얼려서도 죽였다.
이 순례를 이어 가면서 때때로 털썩털썩 주저않고 싶게 암담한 마음에
빠져 들 때가 몇 번씩 있었다. 어찌 죽여도 이렇게 잔혹하게 죽이는가.
무엇을 춤치지도, 누구를 해치지도 않았다. 단지 하나 그가 믿고 있는
진리가 달랐을 뿐이거늘!
자리개 돌.... 서문밖 사형장의 개울위에 있던 돌다리이다...
몇명의 병사가 신자를 들어올려 내려치면
머리가 깨어져 죽어갔다고 한다. 길이420/넓이150/두께30cm
자리갯돌 위에 십자가와 '순교 기념물'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자리갯돌은 1956년 선균식 신부의 주선으로 서산성당 앞뜰로 옮겨져
보관되다가 1986년 다시 제자리로 돌려 놓인 것이다.
"순례자들아. 지금은 말이 없는 돌이나 순교자들의 피 끓는 소리가 들리며,
영원한 숨소리가 들린다. 이 땅은 죽음으로 만가슴에 하늘의 길 가르친 곳
이며, 피로써 빚은 믿음 도로 찾은 이 땅...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음이
이 피거름에 연유함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작은 돌을 다듬어 세우다."
황민성 주교가 새겨 넣은 글이 서러운 마음에 슬픔을 더한다.
돌이 갇혀 있고, 현양탑이 갇혀 있다. 신자들의 피로 물들었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철망에 갇혀 있는 저 돌의 운명은 무엇인가. 이 자리갯돌이
방치되어 있을 때,사람들이 올라가 놀거나 거기에 술상까지 차렸다고 하니
그 모욕을 참다 못해 이렇게 철망을 친 마음이 와 닿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둬두는 것과 그것이 무엇이 다른가.
그 어떤 훼손 속에서도 살아남을 때 그것이 비로소 진실이 아닌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그들이지, 감히 그런 무례가 여기서 죽어 간 이들의
드 높은 정신을 훼절(毁折)할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저 돌을 숭엄(崇嚴)하게 하기 위함이라면,
철망이 아닌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지 않았을까.
임시로 그렇게 둔 것이고 성역화 사업이 마무리되는 날 제대로 자리를 잡을
것이라는 소식에 위안받으며 어두운 마음으로 서 있는 내 어깨에 눈발이 쌓
이는데, 봄을 기다리고 있는 은행나무 몇 그루가 그래도 자리갯돌과 현양탑
을 포근히 에워싸며 서 있다.
해미 사적지의 여러 조형물에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만든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다른 사적지들에서는 누가 만든 것일까 알고 싶어서 여기저기
물어야 하도록 이름을 적지 않아 불편하기까지 했는데, 이곳의 조형물에는
빠짐없이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이 이름들이 있다. 그런데 왜일까. 왜 나는
이 이름이 불편한 것일까.
그날, 나는 눈 내리는 밤길을 더듬어 '갈매못'까지 내려갔다.
밤바다에 눈발이 솓아지고 있었다. 사적비 하나가 바다와 맞닿은 길가에
세워져 있다고 들었고 그런 사진들을 보았는데, 갈매못에는 기념 성전이
세워져 있었고, 사제관인듯싶은 건물도 어둠 속에 바라보였다. 성당은
문이 잠겨 있었지만, 갓 지은 건물이어서 도료 냄새가 났다.
손전등을 비춰 가면서 아내와 나는 두 팔을 벌린 예수상을 그리고 비석들
에 새겨진 글자를 더듬어 읽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만나는
교통 체증때문에 삽교천까지 올라갔다가 길을 돌려 내려오며, 밤 깊은
해미성 앞을 지나게 되었다.
한 번 더 둘렀다 가라고, 한 번 더 지켜보고 가라고, 하느님이 이렇게
마음 써 주시는구나 싶었다. 주변의 식당들도 문을 닫은 시간, 인적이
끊긴 밤 깊은 시간에 다시 만난 해미성... 순교 선인들을 생각해서
더욱 목이 메게 아름다운 성벽을 나는 가슴으로 훑어보았다.
천여 명의 순교 성지가, 해미가 버려지고 멀어져서는 안된다.
기념탑을 더 높이 세우고, 바라보기만 해도 고개가 아픈 거대한 성전을
짓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찾아야 한다. 우리가 여기 와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여기에 와서, 이 통곡의 성벽을 쓰다듬어야 한다.
이 성도(聖都)는, 어떻게든 가꾸어져야 하리라.
그 무엇도 훼손함이 없이 올올이 복원되어, 제자리에 놓일 것은 제자리에
놓이고 떠받들어야 할 것은 떠받들어지고, 그래서 찾아오는 이마다 믿음의
불씨를 껴안고 가는 성스러운 자리로 될려져야 하리라.
그것이 지금 뒤에 가는 우리들이 무명 순교자 선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아주 작고 작은 보속(補贖)의 몸부림이 아니겠는가.
해미는 장엄하다. 이름도 없이 스러져 간 이들의 피가 스며든 땅이기에
그러므로 해미는 더욱 장엄하다. 칭송되고, 배알되고, 숭앙되는 모든 것의
가치를 누가 헛되다 하랴. 그러나 해미는 가르친다. 이름의 허영과 무상함
을 준엄하고 치열하게 가르친다.
스러져 간 꽃들이시여.
그 이름 없음의 장엄함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