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2009년 2월 21일 연중 제6주간 토요일

도구 Ludovicus 2009. 2. 21. 11:13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9년 2월 21일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제1독서 히브 11,1-7

형제 여러분,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2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3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
4 믿음으로써, 아벨은 카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믿음 덕분에 아벨은 의인으로 인정받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믿음 덕분에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5 믿음으로써, 에녹은 하늘로 들어 올려져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하늘로 들어 올리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늘로 들어 올려지기 전에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6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7 믿음으로써,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관하여 지시를 받고 경건한 마음으로 방주를 마련하여 자기 집안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세상을 단죄하고, 믿음에 따라 받는 의로움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복음 마르 9,2-13

그때에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11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13 사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엘리야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




똑같은 소금도 대상에 따라 효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만약 이 소금을 미역에 뿌리면 어떻게 될까요? 죽어있던 미역이 팔팔 살아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소금을 배추에 뿌리면 어떻게 되죠? 싱싱해보이던 배추가 시들시들 죽어버립니다.

똑같은 바람도 배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다릅니다. 정상적인 배는 바람이 불수록 쾌속 항진을 하게 되는 반면에 이상이 있는 배는 바람이 붐으로 인해 오히려 바다 밑으로 완전히 침몰해 버리기도 합니다.

하긴 인생도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즐겁고 행복한 인생인 반면에, 또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운 인생이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소금에, 바람에, 인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이것들을 어떠한 상태에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더 좋은 쪽으로 아니면 더 나쁜 쪽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삶이 형편없다고 외치는 것은 누구 탓일까요? 나에게 다가오는 인생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내 탓이 아닐까요?

그러나 많은 이들이 주변 탓만을 외치고 있습니다. ‘너 때문에…….’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더욱 더 힘들게 만듭니다. 그리고 여기에 정말로 중요한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으뜸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행복에서 더욱 더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떤 선생님께서 주례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하면 3년의 행복이 보장되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결혼하면 평생의 행복이 보장된다.”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추구하고 또한 그것들을 얻는다면 3년 정도의 행복이 보장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평생의 행복은 절대로 보장되지 않습니다.

오늘 제자들이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게 됩니다.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 나라처럼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토록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까지 직접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냥 여기에 눌러 살자고 이야기합니다. 하긴 그동안 전교여행을 하면서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래서 잠시의 행복을 느끼는 지금 이 순간에 그냥 눌러 살자는 말을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그렇지 않지요. 잠시의 행복만을 누리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위해 살아야 하며, 나 혼자만의 행복이 아니라 모든 이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야 함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구름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자신의 생각을 주님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주님께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행복도 내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기다린다는 것, 그것은 사랑에 대해 배워야 할 첫번째 과제이다.(피에트라)



나 때문이야(박성철, ‘희망 도토리’ 중에서)

'너 때문이야'라는 말은 인간관계를 금 가게 하는 유리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나 때문이야'라는 말은 인간관계를 이어주는 본드 같은 말입니다.

비난은 부메랑과 같아서 결국엔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을 명중시켜 버리고 맙니다.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할 때 나머지 네 손가락은 자신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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