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병이란 사회의 근간을 흔들어 파괴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성 자체를 파멸시키는 가장 심각한 질병으로서 죄와 악의 극치를 보여주는 고약한 병이다.
’예수님 당시에 유다인들은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병 환자들은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되어야만 했을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로부터도 추방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상 유다인들은 나병을 죄와 악의 결과로 인식함으로써 나병이라는 육체적인 질병에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를 덧칠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나병 환자들은 공동체가 거행하는 경신례에 절대적으로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나병 환자들은 공동체뿐만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도 단절한 채 살아야 하는 고통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스승님께 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도움을 청합니다. 나병 환자의 외침은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의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갖고 간청하는 나병 환자의 애절한 소망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치유된 그에게 몸이 깨끗해 진 것을 사제에게 가서 확인 받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나병을 낫게 해주셨으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지 무슨 이유로 그러한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기적이라는 것이 영적인 구원에 대한 열망은 제쳐놓고 세속적인 기대감만을 가중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적을 통해서 사실상 중대한 의미를 전달해주고자 하셨던 것이지요.
마르코 복음서 저자는 기적의 사실을 널리 퍼뜨리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이 자리에 수록해 놓음으로써 <그런 놀라운 기적의 행위를 보여준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라는 사실에 관심을 모아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복음을 읽는 모든 시대의 독자들은 분명한 응답을 하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질병과 고통이 없는 세상은 없을까? 그러한 바람을 품지않을 수 없을 만큼 실질적으로 우리는 여러 가지 질병과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우리 자신들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에는 여러 가지 질병과 고통으로 인해 삶을 위협받고 있는 이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누가 그들의 고통을 어루만져 줄 수 있겠습니까?
그 옛날 나병 환자를 따뜻하게 맞아주시며 치유해 주셨던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시련의 일상 속에서 허덕이는 우리 모두를 오늘도 크신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십니다. 그러기에 믿는 모든 이들은 이 순간에도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이웃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나누어 주라는 예수님의 요청을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편협한 사고와 이기적인 욕심 그리고 자의적인 판단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자화상일진대 어찌 우리 사회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악은 질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할 이웃에 대한 성급하고도 이기적인 판단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