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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건강과 영성 2

도구 Ludovicus 2008. 12. 25. 20:30


 


II. 건강한 생활을 위한 가르침

 

  그리스 의학은 건강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다. 그리스인들은 몸의 건강을 지적이고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의사가 하는 일을 인생의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는 배를 확신에 찬 손으로 이끄는 조타수의 역할에 비유하였다. 의사는 어떻게 하면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는지 규칙들을 정해주며 우리의 인생길을 함께 한다. 우리가 이 규칙들을 무시하면 의사는 그들이 가진 치유의 기술로 도와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병을 고치는 것은 의사의 이차적인 과제이다. 셀미브리아Selmybria의 헤로디쿠스Herodicus(기원전 5세기)는 건강한 삶을 위한 가르침, 소위 섭생요법을 가르친 선구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몸이 생활하는 태도에 마음을 쓰면서 자연에 순응하여 산다면 건강은 당연히 따라온다. 반대로 질병은 행동이 자연을 거스른 결과이다.

  히포크라테스는 그의 책, "생활 자세에 관한 규정"에서 건강한 삶을 위한 가르침을 더 발전시켰다. 건강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몸뿐 아니라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 그 당시부터 중세까지 건강한 생활을 위한 가르침은 의술의 중심 자리를 차지해왔다. 의사들 뿐 아니라 신학자들과 영적 지도자들 역시 건강한 생활 자세를 강조했다. 스콜라 철학은‘질서ordo' 와 '규칙regula'을 인간이 살아야 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거듭 강조한다. 이 둘은 중세 때에 삶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개념이다. 위대한 신비가 빙엔의 힐데가르드는 고대의 섭생법에 그 뿌리를 둔 치유 방법에 관한 책을 썼다. 동시에 그녀는 건강에 관한 그리스 가르침과 베네딕도 규칙서의 내용들을 통합하였다.  

 

  “힐데가르드는 인간 공동체 생활에 기초가 되는 책, 곧 베네딕도 규칙서와 갈렌Galen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을 인간에 대한 내적 외적 견해 안에 통합시킨 건강에 관한 지침을 발전시켰다. 이 지침에는 베네딕도회의 '기도하고 일하라'에 입각한 기본적인 생활 규칙을 비롯하여 음식과 음료, 운동과 휴식, 주거와 의복에 관한 것들이 포함된다"(Schipperges, 64).

 

  그녀는 건강한 생활양식의 기본 원칙으로 분별을 매우 강조하였다. 베네딕도는 분별을 영적 아버지인 아빠스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는다. 힐데가르드가 생각한 것처럼, 영성에 유익이 되는 것은 몸과 영혼을 돌보는 건전한 삶에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그런 이유로 힐데가르드는 빛과 공기, 음식과 음료, 일과 휴식, 수면과 기상을 취하는 적절한 한계를 수녀들에게 계속 요구하였다. 힐데가르드의 건강한 생활을 위한 가르침들은 그녀의 영적 조언들과 신비주의와 한데 어울려 있다. 그녀는 영성생활과 건강한 생활양식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보았고 그것으로부터 매우 구체적인 지침을 내린다.

 

  "식사 후 음식의 맛과 즙과 냄새가 가야할 곳에 미처 도달하기도 전에 먼저 잠자리에 들어서는 안 된다. 식사 후에는 잠자는 것을 미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잠을 자기 위한 몸의 조건이 음식의 맛과 즙과 냄새 등을 가야할 장소가 아닌 적절하지 않은 기관으로 돌아가게 하거나 소화기관 안에서 먼지처럼 여기 저기 저리 흩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Schipperges, 70).

 

  우리는 인간의 몸이 움직이는 원리를 이같이 설명한 힐데가르드의 생각을 분명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영성생활과 건강한 생활양식을 떼어놓지 않고 하나로 생각하고, 육체와 영혼을 진지하게 다루고, 또 은총이 자연에 의지하며 자연을 전제로 한다는 스콜라철학의 원리를 따르는 것을 그녀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다.

 

  갈레노스에 의하면, 건강한 생활을 위한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여섯 가지 비자연적인 요소들"을 모두 고려한다.:  1. 빛과 공기, 2. 음식과 음료, 3. 움직임과 휴식, 4. 잠과 깨어남, 5. 분비와 배설, 6. 영혼의 열정들, 감정과 정서이다.

 

  여기에서는 이 여섯 가지 영역들을 각각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그에 따른 영적인 차원들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영성생활을 위해 인간 삶의 자연 조건을 염두에 두는 것은 중요하다. 베네딕도 성인이 관찰한대로, 모든 것은 신중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결코 건강이 우리가 염려하는 모든 것이 되게 해선 안 되지만 늘 건강을 진정한 삶,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과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첫 번째 원칙은 빛과 공기를 올바로 사용하는 문제와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환경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위 환경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된다. 고대인들은 집을 짓더라도 어디에서 인간이 잘 지낼 수 있는지 알았다. 건강뿐 아니라 영적 복지 역시 기온이나 조망, 주거조건 등과 무관하지 않다. 베네딕도 성인이 이유 없이 수도원의 외적구조를 그처럼 강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한번은 꿈에서 떨어진 곳에 있던 형제와 그들의 수도원 건축에 대한 계획을 의논하기조차 했다. 건강에 좋은 건축, 집과 전망의 올바른 관계, 광선의 조건 - 이 모든 것은 단지 집 치장이 아니라 건강한 생활을 위한 것이다. 물론, 이 주장들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기도 하고 사막에서 살기도 한다. 그런 이들은 주거의 외적 조건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모든 인간적인 필요를 거절하고 오직 하느님의 보호만을 찾는 부르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특별한 성소가 없다면, 하느님이 창조물 안에 만드신 질서를 존중해야 하고, 영혼과 육신이 모두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 생활을 가꾸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집은 우리를 병들게도 하고 건강하게도 한다. 그것은 잘못된 건축설계나 몸에 해로운 건축자재, 혹은 수맥이나 방사선 위로 지나가는 건물의 부적당한 위치 때문만이 아니다. 이것은 방을 정돈하는 방식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지나치게 멋을 부린 현학적인 방이 있는 반면 멋스러움이라곤 전혀 없는 방도 있는데 이런 것들도 영혼을 해칠 수 있다. 영성이 너무 천상적인 탓으로 자신이 사는 방을 품위 있게 정리하고 정돈하는 것을 소홀히 할 정도가 되어선 안 된다. 우리가 사는 외적 공간을 정돈하면 영혼 역시 정리될 수 있다. 기분 좋은 그림이나 멋진 가구로 방을 꾸미는 것은 영혼에도 역시 이롭다. 물론 우리는 외적인 것에 의존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인간임을, 두 눈을 가진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눈이 요구하는 건강상의 필요들을 존중해야만 한다.  

 

  우리가 어디에 살며 무엇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지에 따라 생명은 영향을 받는다. 외적인 것에서 받는 느낌들은 우리 영혼에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지구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리스도교적인 일이다. 살고 있는 공간만이 아니라 귀를 자극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은 우리 안에서 계속 어떤 작용을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둘러싼 소음들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귀를 부드럽게 대해야 한다. 귀를 계속해서 시끄러운 소음에 노출시키면 몸이 병들게 된다. 우리 안의 어떤 것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파괴시키는 음악도 있다. 텔레비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텔레비전의 영향을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다. 어떤 이미지가 하루 종일 내 안에 남아 있는가가 문제이다. 우리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텔레비전에서 본 형상들인가 아니면 성서의 이미지인가? 

 

  건전하게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한 관심은 오늘날 널리 퍼져 있다.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먹어댈 수도 있지만, 적절한 음식물을 섭취하여 끝도 없는 약물치료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다. 많은 질병이 음식으로 조절된다. 적당한 식사와 단식은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중요한 수행의 하나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규칙서에 음식과 음료의 분량에 대한 장을 따로 썼다. 그는 먹고 마시는 자세가 우리 영성에 큰 영향이 있다고 확신했다. 지성으로만 영성생활을 할 수 없다. 온 몸이 쓰인다. 적당하고 건강하게 식사를 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영적인 삶을 위한 동기 없이 부적절한 식사습관을 고치려는 것은 소용없는 시도이다. 몸무게를 조절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만이 우리 노력의 목적이라면, 건강을 염두에 둔 음식섭취는 전혀 즐겁지 않고 단지 고집스런 실천만 강요하는 하나의 관념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우리는 언제나 몸과 영혼의 일치를 의식해야 한다. 몸은 너무나 귀한 것이다. 몸과 몸의 법칙들을 존중하여 의식적으로 적당하게 먹고 마시면서 몸을 친절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몸의 요구를 지나치게 들어주란 뜻이 아니라, 몸이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들이고 더 투명해질 수 있도록 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음식을 먹는 자세는 우리 몸뿐 아니라 영성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 과거에 적절한 식사는 마음의 순결을 지키는 영적 투쟁의 수덕적 수단이 되었다. 지나치게 먹고 마시는 것은 성(性)을 자극한다. 그런 까닭에 옛 수도자들은 성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단식을 하였다. 먹고 마시는 일이 몸과 영혼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것은 심한 과식을 하게 되면 즉시 알 수 있다.

  너무 먹거나 날씬한 몸매에 대한 집착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가고 있다. 이런 습관들은 몸과 영혼 모두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어떤 사람들은 지나치게 먹어댐으로써 모든 어려움을 회피하려고 한다. 음식으로 자신을 가득 채워서 분노나 실망, 고독을 느끼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거듭되는 도피와 자기 자신에 대한 끝없는 좌절로 끝날 수밖에 없다. 심리치료로 폭식 습관을 고치기도 한다. 그러나 정신적이고 영적인 근본적인 변화를 동반할 때에만 성공한다. 과식하는 이들은 자신의 삶과 욕구가 말하는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 억압된 욕구들을 인정해야 한다. 폭식은 이런 현실에 나를 놓아두신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이기에 이 습관을 고치려면 영적으로 새롭게 방향을 잡아야 한다. 나의 모든 욕구를 다 들어주지 않는 세상을 내게 허락하신 하느님과 마주해야만 한다. 폭식은 종종 어머니를 대리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음식이 아니라 하느님과 자기 자신 안에서 안정을 찾으라고, 자기 자신과 함께 편안해 지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의 신비가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많이 먹는 문제만 우리 영성 생활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먹고 마시는 모든 방식이 다 그렇다. 얼마나 먹고 마시는지는 내 영적인 성숙도를 보여준다. 만일 내가 모든 것을 꿀떡 꿀떡 그대로 다 삼켜버린다면 하느님과 창조물들 역시 그런 방법으로 대할 것이다. 책도 그런 식으로 읽어치울 뿐 진정으로 즐기지는 못 할 것이다. 영적인 삶은 침묵과 경외, 그리움, 하느님 앞에서의 쉼을 추구한다. 그렇게 할 수 있고 없고는 역시 나의 먹는 습관에서 나타난다. 베네딕도 성인이 특별한 이유 없이 식사를 성스러운 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도승들은 식사 때에 창조의 선물인 음식물만이 아니라 식당독서로부터 들은 것도 함께 섭취하였다. 이렇게 식사는 마음과 영혼이 함께 하는 일이며, 하느님의 선물과 말씀을 받아들이고 소화시키는 일이다.

 

   외적인 식사 예절은 한 사람의 몸과 영혼 전체에 영향을 준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허기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가능한 한 빨리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패스트푸드) 경향이 있는데 교양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태도이다. 식사기도는 단지 경건한 관습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이다. 식사기도는 중대한 기도도 아니고 종종 판에 박힌 것이 되고 말지만, 우리가 함께 하는 식사가 거룩한 것이며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을 즐길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만일 모든 이가 음식이 식탁에 오르기 무섭게 먹기 시작한다면, 그런 자리는 식사가 아니라 거친 급식이 제공되는 것이다. 중세기의 영성 작가들이 식사 예절이나 예법 같은 자칫 진부한 주제에 대해서 쓴 사실은 몸과 영혼의 활동과 영향에 대한 그들의 깊은 이해를 증명한다.

 

   건강한 생활의 세 번째 영역은 움직임과 휴식, 노동과 여가의 조화로운 순환에 대한 것이다. 헤로디쿠스는 일과 여가, 노동과 휴식이 조화를 이루는 규칙적인 하루일정을 만들었다. 그의 목표는 개인의 건강이었다. 베네딕도 성인은 규칙서에서 일과 휴식의 합리적인 배치에 입각한 건강 원칙을 적용했고 그것이 중요한 영적 가르침이 되게 했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 일과 기도의 조화로운 결합은 베네딕도 수도생활의 특징적인 표시이다.

 

 성 베네딕도는 건강한 생활을 위한 가르침의 원리들을 영성생활에 적용하면서 신앙의 치유적 차원이 드러나게 하였다. 영성은 지적이고 영적인 것에만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모든 차원을 포함한다. 힐데가르드 성녀는 규칙서에 대한 설명에서 베네딕도 성인이 그의 명령의 날카로운 못을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게 박았다고 썼다.“그는 정수리에 못을 칩니다"(Schipperges, 66). 그는 강한 사람이나 약한 사람이나 모두 건강과 영혼에 주의를 기울이며 피어나고 성장할 수 있는 생활 방식을 규칙서에 제시한다. 베네딕도 성인의 목표는 제자들이 수덕적인 성과를 올리도록 재촉하는 데 있지 않고, 몸과 영혼의 건강을 촉진시키는 생활양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한 자리를 제공하는 데 있었다.

 

  베네딕도회의 하루 질서는 자연스러운 신체 리듬과 조화를 이룬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체리듬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절한 하루 질서는 우리를 치유하고 더 생산적으로 만든다. 우리는 기도하고 일하는 시간들이 우리 자신의 자연적 리듬에 맞도록 정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어떤 일을 하라고 계속해서 우리자신을 강요할 필요가 없다. 오랫동안 적절한 날질서를 따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몸과 영혼에 다 이로운지 경험한다. 베네딕도회의“기도하고 일하라"는 기본적으로 건강한 영성생활은 건강한 생활방식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강한 생활방식은 적절한 시간 분배만이 아니라 일상의 주된 일들을 하는 방식과도 관계가 있다. 예컨대, 일 할 때의 몸의 자세가 그렇다. 나는 일 할 때 긴장하는가 아니면 자유로운가? 어떤 생각과 느낌들이 우리가 하는 일을 따라 오는가? 일을 할 때도 역시 하느님과 함께 있는가 아니면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가? 방심하지 않고 깨어있는가 아니면 마음이 산란하고 흩어지는가?

 

  생활 방식은 우리가 지내는 하루의 모양새를 만드는 여러 가지 습관들도 포함한다. 좋은 습관도 건전하지 못한 습관도 있다. 아침에 침대에서 괴롭게 일어나는 것이나 급하게 아침식사를 먹어치우는 것은 불건전한 습관이다.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행하는 모든 일에서 기쁨을 얻는 것은 좋은 습관이다. 개인적인 습관들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건강한 영성생활은 일정한 생활 방식과 틀을 필요로 한다. 그런 외적 형식이 없으면 영성생활은 단지 의지의 놀이터가 되고 말며 그러다 보면 항상 과도한 부담을 느끼게 된다. 영성생활은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건전한 생활방식은 영성생활을 성장하게 하고 몸과 영혼에 치유의 효과가 있다. 한편, 의지에만 기반을 둔 영성생활은 결코 그 의지를 제어할 수 없기에 우리를 긴장하게 하고 쉽게 병에 걸리게 한다. 그 결과 의지는 우리 안에서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건강한 삶을 위한 가르침의 네 번째 법칙은 기상과 취침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수면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베네딕도 성인은 규칙서에 수도승들을 위한 수면 시간을 정해 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은 수도승 전통의 중요한 주제이다. 잠을 지나치게 많이 자는 사람은 둔해지고, 어떤 것으로부터 쉽게 도망치려 한다. 이런 사람은 진실을 직면하려 하지 않고 잠에 빠지는 것으로 도피한다. 한편 잠을 충분히 자지 않으면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없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중요성을 너무 과대평가 하는 사람은 쉴 수 없다. 물론 필요한 수면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잠을 지나치게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너무 조금 자면서 자기 자신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한다.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수면장애로 어려움을 겪는다. 모든 이들이 이것을 정신적 문제의 표시라고 본다. 무엇인가에 억눌려 있기 때문에 혹은 해야 할 일을 결코 마무리하지 못 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수면장애는 일종의 경고신호이다. 자신을 잘 살펴보아야 하고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역시 이 장애들을 사무엘과 같이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말씀하십시오, 주님. 종이 듣고 있습니다.”이렇게 한다면 더 이상 수면부족에 신경 쓰지 않고 긍정적으로 이 문제를 수용할 수 있다. 잠들지 못할 때 그 시간을 영적인 일이나 기도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 그래도 다음날 수면부족 때문에 일에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온전히 일할 수 있으려면 밤에 충분히 잠을 자야한다고 스스로를 설득시키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수면을 단지 일을 잘 하게 하는 수단으로만 간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잠은 몸의 여러 가지 기능 중 하나가 될 뿐, 더 이상 하느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장소, 하느님이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거시는 장소가 될 수 없다. 잠은 몸을 회복시킬 뿐 아니라 영혼을 회복시킨다.

 

  잠을 자면서, 영혼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무의식이 움직여서 꿈속에서 자신을 표현한다. 꿈에 나타나는 진실은 의식이 깨어있을 때의 현실만큼이나 진실한 것이다. 건강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꿈이 말하는 진실을 이해해야 한다. 꿈속에서 우리 무의식은 그날 있었던 일들과 우리가 성장을 향해 가는 여정의 현재 조건들을 지적하고 그것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사물을 이해하는 의식적인 관점은 대개 단편적이기에 우리는 꿈이 말해주는 것을 알아들어야만 한다. 꿈을 통해서 그날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또 그 일이 담고 있는 중대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현재 상황은 어떠한지, 어떻게 우리가 잘못된 길을 향해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바른 길이 있는지, 또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하느님께 자신을 닫고 있는지 아니면 열어 왔는지, 그리고 이제 어떤 걸음을 시작하라고 지시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무의식은 꿈의 형상들을 통해서 말한다. 영적 여정에서 꿈이 하는 말은 하느님과 우리 자신의 진실을 무시하지 않도록 도움을 준다.

 

  유대인 사색가, 바인렙Weinreb은 우리가 잠자는 동안 참된 진실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거룩한 생명과 연결된다. 꿈속에서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에 이야기 하신다. 우리는 하느님의 내심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수도승들은 밤침묵을 중요하게 여겼다. 밤의 침묵은 치유하고 신성하게 하는 자리로, 잠들고 꿈꾸는 것을 돕는다. 밤의 고요함은 모두에게 유익하다. 밤침묵의 한 가운데에서 거룩한 말씀은 우리의 귀를 뚫고 들어오기 위해 내려오신다. 성탄 전례는 밤침묵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 시간임을 보여준다.

 

  바인렙은 매일 매일이 우리가 밤의 침묵 가운데 꿈속에서 인식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합리적인 동기나 의지의 의식적인 결정에는 아주 조금만 의지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꿈속에서 우리 마음에다 이야기를 하시도록 밤의 경건한 침묵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소란한 밤은 영혼을 신성한 근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오직 침묵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하느님의 음성을 덮어 버린다.

 

  다섯째 법칙은 분비와 배설에 관한 문제이다. 이것은 얼핏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신신체학의 창시자, 그로덱Groddeck은 변비 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변비는 한 사람의 정신 구조를 드러낸다. 그는 변비가 있는 사람들은 버려야만 하는 어떤 것을 움켜쥐고 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마치 자연이 그들에게 살아있는 내장 대신 주석으로 만든 파이프관을 준 것처럼 살아간다. 힐데가르드는 내장의 소화 과정을 포도주틀에 비교하였다.  
  땀과 눈물, 침이나 정액, 소변과 대변처럼 쓸모없고 이질적인 것은 버려진다. 그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그것은 마치 포도주 틀을 통과하는 포도와 같다. 주스는 항아리에 담기고, 껍데기와 같은 찌꺼기는 버린다.(Schipperges, 72)"

 

  배설 문제는 性에 관한 주제로 우리를 이끈다. 건강한 생활을 위한 가르침의 영성은 성을 올바르게 대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 과정에서 교회가 성을 무의식적으로 타부시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성스러운 단어들로 성을 승화시키고 싶어하는 사람은 딜레마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영성생활의 여정에 성을 통합시키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혼인한 사람들은 결혼함으로써 성생활을 즐길 수 있다. 그들은 성적인 일치로 온전히 다른 존재,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싶은 갈망을 표현한다. 성적으로 살아있다는 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체험하면서 하느님께 가는 길 역시 의미한다. 그러므로, 결혼한 사람들은 결혼생활을 통해서 그들의 성적 욕망만 채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됨을 즐기면서 그들의 성 욕구를 하느님께 대한 그리움으로 승화시킨다. 우선 이 과정에서 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사실 종교인들이 이것을 먼저 인식해야만 한다. 성 에너지는 생명력이 넘치는 에너지이다. 이것을 얼어붙게 만든다면, 반쪽만 살아있는 셈이 된다. 그리스도인은 성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이 주는 즐거움을 잘 누리면서 생명력, 몸의 생동감, 그리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싶은 갈망의 완성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성과 함께 사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들은 영적인 방법으로 성을 통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성을 치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에로스 안에서 변화시키는 것이다. 성의 에로틱한 흐름이 하느님과의 관계로 흘러들어갈 때 영성생활은 보다 강력하고 결실 있는 것이 된다.  

  에로스로부터 성이 변화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 필수적이다. 진정한 신비주의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참된 에로스가 필요하다. 요즈음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 중에 신비주의자가 너무 적다는 사실은 에로스와 성의 힘을 간과하는 문제와 연관이 있다. 많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체험으로 에로스를 변화시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예로, 아빌라의 데레사와 그라시안, 프란치스코와 글라라,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의 관계를 들 수 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정수를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의 만남 안에서 뚜렷하게 보여준다. 정결은 에로스와 성을 억압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에로스의 에너지가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물어야 하며, 사랑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이 사랑과 애착이 어떻게 그들 자신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지 물어야 한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나의 영성생활이 얼마나 견실한지 보여준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에로스를 하느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요소로 보지 않고 차라리 활력을 주는 힘으로 이해하였다. 그라시안Gratian에 대한 사랑은 그녀를 하느님으로부터 떼어놓지 않았고 더 순수하고 내밀한 깊이로 하느님께 가도록 인도하였다. 그녀는 그라시안에 의해 어루만져졌고 그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랑을 하느님께 봉헌하였고 더 새롭고 친밀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독신자는 어떻게 성을 영성생활에 활력을 주는 에로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성을 묶어  버리거나 의지적 억압이나 훈련으로 제압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성을 그대로 통과하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고 느낌으로써 가능하다.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자신의 성으로부터  찾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나아갈 수 있게 하고, 온전히 현존하게 하고, 온전히 살아있게 하고, 온전히 진실하고 참되게 하는 위대한 생명력과 봉헌을 열망한다.

 

우리가 성에 대해 갖는 기대는 모든 가능한 깨달음을 능가한다. 그것은 결혼한 사람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적 쾌락을 맛보면서, 성 경험이 완전히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부부의 결합이 궁극적으로 하느님께로 그들을 인도하기 원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독신자들이 포기를 통해 성을 승화하는 것과 같다. 신비가들은 그들의 하느님께 대한 의존과 하느님과 하나 되고 싶은 깊은 갈망을 표현하기 위하여 성과 사랑(에로티시즘)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성을 부정하지 않고 성을 생각하였고 성 안에 잠재되어 있는 일치를 향한 실존적 갈망을 하느님께로 이끌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채워지지 못한 결핍과 다른 성에 기우는 경향을 인정하였고,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성 문제를 대신 알아서 돌봐주실 거라고 천진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요한네스 타울러나 엑카르트, 힐데가르드나 데레사와 같은 신비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들의 영성이 생명력과 인간미, 자유로움와 광대함, 친밀감과 부드러움을 호흡하고 있음을 느낀다. 에로스로 충만한 영성에 이르게 하는 조제하기 쉬운 처방 같은 것은 없다. 혼인한 사람들은 그들이 경험하는 성의 차원을 변화시키면서 하느님께 나아가고, 독신자들은 하나 되고 싶은 갈망에서 비롯된 그들의 깊은 상처를 인정함으로써 하느님께 나아간다. 하느님께서 이 상처를 어루만지시도록 그리고 우리의 부서진 마음을 그분께 봉헌하도록 스스로 허락한다면, 우리의 성은 삶을 비옥하게 하고 우리 주위에 그 결실이 퍼져 나가게 하는 사랑의 흐름이 될 수 있다.

 

  마지막 규정은 열정과 정서, 영혼의 감정들에 관한 것이다. 고대의 치유는 사고와 감정이 우리를 병들게 한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건강하게 살려면 사고와 감정을 올바르게 다루어야 한다. 이것은 사고와 감정을 금지하거나 억압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부정적인 생각들이 우리를 지배하거나 병들게 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바그리우스는 병에 걸리게 만드는 생각들에 관하여 특별한 책을 썼다. 그는 자기연민의 감정이나 끊임없는 불평이 한 사람을 어떻게 방해할 수 있는지, 어떻게 신체적인 병을 만드는지 설명하였다. 그는 분노의 악신이 인간의 영혼을 삼켜버린다고 했다. 이것은 미국의 종양학자, 칼 시몬톤Carl S. Simonton의 통찰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설명이다. 그에 따르면 오랫동안 계속 일어난 분노는 말 그대로 몸의 세포를 삼켜버린다. 정신이 더 이상 분노에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몸이 그 반응을 대신해야 하고 따라서 병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몸을 건강하게 지키려면 생각과 감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다. 

 

  이것은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인 감정으로 바꾸라는 그런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선 감정은 인정되어야 한다. 미움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단지 억압되기만 한다면, 그것들은 몸 안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이런 감정들을 억누르지 말고 바라보아야 하며, 자연스럽게 내적으로 깨어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태도로 그 감정들을 표현해야 한다. 우리가 분노를 인정하고 그것을 잘 이해하면서 바라본다면 쉽게 불같이 성을 내지 않을 수 있다. 대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감정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그 분노를 진심으로 느낀 후에야 비로소 분노를 억압해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내밀한 감정, 곧 상대방과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격분을 그대로 표현해 버릇하면 화내는 것을 반복하게 될 것이고 내면의 다른 과정이 진행될 수 없다. 자신의 공격성을 표출할 수 있어야 하지만 자신과 다른 이들을 배려하면서 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소외되는 것이 두려워 부모에 대한 공격성은 물론 자녀들을 향한 공격성도 인정하지도 표현하지도 못하여 병에 걸린다.

 

  교부들은 열정을 억압하라고 충고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과 대화하기를 권한다. 포이멘 아빠스의 표현대로, 우리는 열정들로부터 무엇인가 얻어야 하며 또 무엇인가를 열정에게 주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좀 더 조화로워 질 것이다. 단순하게 우리 안의 공격성을 표현하는 것은 파괴적인 결과를 만들고 성숙을 방해하지만, 그것들을 억압하는 것 역시 우리를 병들게 한다. 필요한 것은 건전한 통합이다. 오직 이 방법으로 열정들 안에 있는 힘은 유익한 것이 된다. 한 사람에 대한 증오는 언제나 어떤 긍정적인 충동을 포함한다.‘나는 복종하는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나는 나만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미움이 너무 오래 가면 자신을 해친다. 그러나 순간적인 증오의 감정은 다른 사람의 지배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걸음을 내딛도록 나를 도울 수 있다. 증오는 필요한 거리를 만들라는 하나의 도전이기도 하다.

 

  수도승들은 사고와 느낌들을 다루는 다양한 원리들을 개발했다. 이러한 원리들은 우리에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정직하게 보고 긍정적으로 다루라고 요구한다. 수동적인 자세로 감정과 생각을 대한다면, 그것들이 우리를 병들게 할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 감정들 자체에는 책임이 없다. 그러나 그 감정을 다루는 방법은 우리의 책임이다. 이것은 단지 심리학적 관찰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열정을 봉헌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드린다면, 그 안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파괴적인 힘을 잃어버릴 것이고 모든 것이 우리의 선을 위해 일할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이사야 예언자가 생생하게 표현한 것처럼, 우리 안의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들조차 하느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수도승들의 표현대로, 영성생활은 우리를 건강하게 한다. 그러나 영성생활을 합리화시키면서 건강을 지키는 하나의 기술로 이용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께 순종하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병을 주실 때에도 역시 그렇다. 건강하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아니다. 구원과 건강은 같지 않다. 구원은 거룩한 사람들 안에서 그들의 병을 통해서 드러났다. 바울로는 몹시 고통스러운 병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가 계속 간청하였지만 하느님은 그를 자유롭게 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불평에“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능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고린 12,9)"라고 대답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건강한 영혼이 건강한 신체에 자리할지, 약하고 병든 몸에 자리할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결정하시도록 두어야 한다. 그 자리는 하느님의 힘이 순수한 은총으로 우리가 바라지도 못하는 선물로 더 분명한 모든 것이 되는 자리이다. 이것은 우리의 투명성에 달려있다. 건강한 몸은 하느님의 구원을 주위에 전파한다. 아픈 몸은 그가 자신의 강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에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느님의 성령은 온전함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 일하신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만드는 인상은 중요하지 않다. 하느님의 성령과 그분의 능력이 중요하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봉사 안에 놓아둔다면, 우리가 신체적으로 건강하든 아프든 상관없이 좋은 일을 위해 쓰여질 것이다. 그리고 바울로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될 것이다. 그는 몸에 박힌 가시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씁쓸함이 아니라 사랑과 생명력, 진정함과 성실함을 보여주었다. 그의 고통은 장애를 증명한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람들과 하느님께로 더 나아가게 하였다.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 그는 아주 깊은 평화를 체험하였고 생명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선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건강한 사람으로 봉사하든 병든 사람으로 봉사하든 거기엔 다름이 없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이다.


- 조성옥 에노스 수녀(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역

 

 

 


출처 : 인디고 유니콘
글쓴이 : 봄날isu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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