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의 교회
-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의 <하느님 백성> 개념에 나타난 평신도 -
이제민 신부
공의회가 끝 난지 20여년이 지난 작년 10월, 세계 주교 시노드에서는 평신도 문제를 그 중심의제로 다루었다. 이것은 평신도 문제가 교회의 본질을 이해하는 개념임을 시사한 것이라 할 수 잇다.
아직까지 평신도가 사목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그 대상으로만 여겨지고 있는 상황에서,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이 개념을 정리해 봄으로써 교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1)
Ⅰ. 한국천주교회와 제 2 차 바티칸공의회의 수용
1) 일반적인 평신도 이해와 그 문제점
제 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의 위치를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잇다. 이에 따르면 평신도는 교회의 여러 과제를 떠맡고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명과 직무(왕직, 사제직, 예언직)에도 참여한다. 그러나 공의회의 이런 규정 이전에도, 평신도는 스스로의 사명과 위치에 대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즉 평신도들도 그들 자신이 누구인가, 교회와 동일시되는 존재인가, 아니면 교회를 구성하고 지탱하는 요소로서의 단순한 기능인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2).
그러므로 공의회의 평신도관을 다루기 앞서, 평신도는 스스로를 누구라고 보고 있으며 그들 자신에 대한 공의회의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며 평신도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리라 본다. 그러나 여기서는 직접 이 문제를 다루지 않고 현재 한국천주교회 안에서의 평신도의 위치(대우)를 언급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것은 이어서 거론되겠지만, 아직도 우리의 평신도는 자신의 위상을 정립하고 표명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한국의 평신도는 공의회가 끝 난지 20년이 지나도록 여기고 있을 뿐, 스스로가 교회를 이루는 교회 자체로는 가르침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성직자의 명령에 따라- 교회의 일부 기능을 수행하고 부수적 역할을 이행하는 것으로 그들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여기며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독자적인 활동은 하되 여전히 스스로 교회를 구체화하는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을 규정하는 힘도 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평신도의 위치와 과제에 대한 이런 기능적인 이해의 부족은 근본적으로 한국천주교회 자체에 그 책임이 있다고 하겠다. 한국천주교회가 평신도를 그렇게 대하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각 본당의 사목실태를 살펴보면 금방 드러난다. 본당은 성직자 중심으로 운영이 되고 있어, 성직자가 교회이고 평신도는 사목의 대상일 뿐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평신도 사도직혐의회가 구성되어 있지만, 이는 본당 신부의 사목방침을 실현시키기 위한 조직으로서의 기능과 그 역할을 할뿐이다. 이런 현상은 교회가 평신도에게 그들의 본질과 임무를 인식시키지 못했음을 입증하는 것이고, 평신도 문제를 그 본질적인 차원에서 다루는데 인색하였고 나아가서 아직도 공의회에 나타난 평신도상과 교회관을 소화해내고 있지 못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방금 지적한대로 평신도에 대한 이해부족은 무엇보다도 <교회>가 인격적인 개념임을 깨닫지 못한데서 그 원인이 찾아진다. 본래 교회는 인간들의 공동체로서 인격적 개념이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이 인격적 의미에서 통용되고 있지 못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교회공동체에 소속된 그대로의 구성원이 참된 교회이고(평신도가 교회이고), 그래서 교회는 하나의 인격체인데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교회가 어디가지나 제도로만 대하여지고 있다. 비근한 예로 "교회에 간다." 는 말은 하여도 "내가 교회가"라고 자신을 교회와 동일시하여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이 표현은 생소하여 틀린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도 평신도만이 아니라 수도자, 사제, 주교에 이르기까지 이런 식으로 교회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교회가 제도로서만 이해되는 상황에서는 교회의 직무자들이 그리스도의 과제를 평신도와 함께 나누어지기보다는 오로지 평신도와 교회를 관리하는 위치에 서게 되고, 그 결과 평신도는 사목의 대상이 되고 성직자는 사목의 주체가 되는 이원화 현상이 불가피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평신도가 실체 몸담고 살고 있는 사회와 신앙의 교회, 다시 말해 신앙의 이원적 대립현상도 피할 수 없게 된다.4)
이런 이원화된 상황에서는 교회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전체>로서의 <하느님의 백성>의 책임이 강조되긴 하지만, 이 하느님 백성이 인간들이며 그 자체로 교회라고 하는 점은 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봉사는 부르짖되 그 인간들은 단순히 봉사의 대상으로만 보여 질 뿐 인격의 만남은 되지 못하고 만다. 그런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라 하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백성을 심판하는 법정으로서 행세하게 된다. 평신도와 교회의 개념이 이처럼 비인격적으로 사용되는 한 시행착오와 책임감 결여는 물론 어떤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실제로 이런 시행착오는 가정, 노동, 청소년, 여성 등 제반 분야에서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제반 사회문제들이 현실 속에 살고 있는 평신도를 직접 둘러싸고 있고, 또 교회도 이와 관련하여 문헌을 발표하면서 관심을 보이고 고심하지만, 교회가 스스로를 인격체로 체험하지 못하고 또 평신도가 사목의 대상으로만 취급되는 데서 실제로는 <노동자의 교회>, <청소년의 교회>, <여성의 교회>가 되지 못한다.5) 한마디로 교회가 이들과의 인격적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데서 교회의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청소년은 교회의 위임을 통한 교육의 대상일 뿐 교회 자체가 여성적이며6), 여성의 교회라는 점은 잊게 된다는 말이다. 여성의 인격이 그대로 하느님 백성으로, 인간으로 대접받는 곳이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교회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지적한 몇 가지 점에서 교회의 개념을 인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게 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높이 평가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공의회는 교회를 하느님 백성으로 정의함으로써 교회를 인격적으로 바라보게 하였고 교회 안의 이원화 양상을 극복하는데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러므로 평신도가 그들 자신에 대해서 올바른 견해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공의회의 정신을 깊이 연구하는 것이 급선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교회와 사회, 신앙과 일상 등의) 이원의 극복을 체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런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성직자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이 협조란 다름 아닌 그들 스스로가 공의회가 이원의 극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를 연구하고, 그 수평에서 자신과 평신도를 대하는 것이다.
이에 한국천주교회가 지금껏 공의회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를 반성해 보고, 그 다음으로 공의회의 평신도상을 성직자의 관계에서 밝혀 보고자 한다.
2) 한국천주교회의 제 2 차 바티칸공의회 소용에 나타난 문제점
제 2 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에 대하여 두 개의 문헌(교회헌장, 사목헌장)을 제정하였다7). 그러나 이 두 문헌은 지금껏 대단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수용되어 왔다. 「교회헌장」은 단지 예비형태로만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교회헌장」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하느님 백성의 개념이, 여전히 평신도는 하느님 백성이고 수도자와 성직자만이 교회다 하는 식으로 사용되어왔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목헌장도 전적으로 하느님 백성의 교회를 말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통한 인간의 소명이라는 원칙을 다루는 중요한 문헌인데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여기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이 헌장의 정신을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평신도의 세계에 대한 봉사를 교회의 구원 봉사 자체로 이해해야 하며 교회의 구원봉사를 사제에게만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고도 그렇게 대중적인 것이 못되고 있다. 교회의 구원봉사는 바로 인간 존재에 대한 봉사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백성에 대한 봉사라는 이 문헌의 정신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느님 백성>이라는 개념에 나타난 교회의 인격성과 세속성은 실로 한국교회가 인식해야 할 시급하고도 근본적인 과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근본적인 과제가 해결되지 않고선 평신도와 성직자간에 일어날 수 있는 마찰과 불신을 막을 수 없을 것이며, 이는 전체 교회를 분열시키는 불행한 요인이 될 것이다. 작년 12.16 대통령선거에 즈음하여 내놓았던 한국주교단의 성명서와 이에 대한 한국천주교 평신도 사도직협의회가 발표한 「한국천주교 평신도에게 드리는 호소문」에서 볼 수 있었던 마찰도 결국 한국천주교회가 아직까지 교회의 양면성, 즉 교회의 인격성과 세속성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는 데에도 역부족을 보여준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교단이 교회의 세속성을 교회의 본질을 받아들였다면 평신도를 사목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평신도도 그들 스스로를 사목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교회임을 인식하고 또 교회가 제도가 아닌 인격체임을 이식했다면, 그리고 주교단이 이 인격체를 구체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면, 그런 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항의서를 내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물론 주교단이 자신을 이녁체로 인식하고 있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교회의 인격성과 세속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 이외에 한국교회가 깨쳐야 할 또 하나의 근본 과제는 자기가 속한 그 지체들 안에서 한국교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교회가 사회 안으로 확장되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천주교회가 인격적, 세속적 교회이기를 거부하는 한 스스로의 내적 합법성을 잃고 말 것이다.
이러한 인격적 세속적 교회의 올바른 이해를, 이원의 극을 극복한 <하느님 백성>이라는 개념8)에서 보게 된다. 이 개념으로 우리는 교회가 누구이며, 평신도가 누구인지, 사제가 누구인지, 또 그들 간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옳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이 개념에 의해 평신도와 사제를 재조명해 보기로 하자.
Ⅱ. 하느님 백성 개념에서 본 평신도
평신도에 대한 2차 바티칸공의회의 근본적인 이해는 교회를 하느님 백성으로 보는 「교회헌장」 2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평신도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전개함으로써 사제와 평신도를 상하관계로 이해하던 종래의 관념을 극복하였다. 종래에는 교회를 교계제도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교계제도가 교회였고 평신도는 그 백성이었다.
그러나 「교회헌장」 2장에 나타난 <하느님 백성>의 신학적 핵심은 평신도와 사제가 본질적으로 동등한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계제도가 교회이고 평신도가 하느님 백성이며, 교계제도도 백성이고 평신도 역시 교회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제와 평신도가 함께 새로운 하느님 백성, 메시아적 하느님 백성,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 백성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 백성은 제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 제정되었다. 교계제도나 성직자가 아닌, 그리스도 자신이 하느님 백성을 함께 부르시고 그리스도 자신이 하느님 백성을 성세성사로 이끄셨고 또 그리스도가 하느님 백성의 견진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하느님 백성을 예언자로 가르치고 왕으로 이끄시며 사제로 거룩하게 하신다. 그리스도가 왕적, 사제적, 예언자적 과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활동이 교회에 교회로서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교회의 임무를 구체화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봉사는 곧 그리스도의 봉사이며 그리스도 자신이 교회의 과제이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수하는 제도로 이해되어있고 인간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하여 교회 안으로 편입되었다. 이렇게 볼 때 평신도로서 교회에 참여한 것은 평신도가 그리스도로부터 보내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평신도가 교회 안에서 자기 위치를 지키는 것은 교계직에의 참여가 아닌 그리스도 자신의 직무에 참여함으로써 이다. 이에 대해 「교회헌장」 31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세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입고 하느님 백성으로 만들어진 평신도는 그들 나름대로 그리스도 백성의 사명을 교회와 세계 안에서 수행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왕 직, 사제직, 예언직에 참여한다.”9)
그렇기 때문에 평신도는 교회 안에서 하나의 공공연한 위치를 누리고 있는 교회로서 세속 속의 교회이다. 공의회는 이처럼 평신도직을 그리스도론에 입각하여 이해하면서 하느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이 교계적 구분을 벗어나 참된 평등 속에 있음을 주장한다. 그것은 하느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다함께 하느님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가 영적 공동체이며 또 세속적 모임이다. 그리고 모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그리스도의 임무를 따르도록 불리워졌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에 속한 모든 구성원 가운데 실재하며 인간은 성세와 견진을 통해 이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제도 이상의 인격적 공동체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희망이 된다. 이처럼 교회를 인격적 주체로 보고 존재적 인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지금까지는 관철되지 못했으나 이것이야말로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위치를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 관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를 인격체와 동일시하는 관점은 공의회보다 훨씬 먼저 교황 비오 12세께서도 강조한 바 있다. “신앙인은, 특히 평신도는 교리적 삶의 가장 전초적인 선에 서 있다. 교회는 평신도에게 있어서 인간사회의 생활원칙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신도는 ‘우리는 교회에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교회다.’라고 보다 분명히 의식해야 한다.”10)
공의회가 교회와 평신도의 동일성을 주장한 것은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21항에서도 역력히 볼 수 있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평신도 신분이 만일 교계제도와 함께 존재하여 활동하지 않으면, 교회는 참으로 건설된 것이 아니며 충분히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표시도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평신도들의 활동적 참여 없이는 한 백성의 정신과 생활, 그리고 그 활동 속에 침투해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건설될 때 성숙된 그리스도교적 평신도 신분이 계발되도록 최대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믿음을 가진 평신도는 온전히 하느님 백성에 속하며 동시에 온전히 시민사회에도 속한다. 그들은 그들이 태어난 민족의 일원이며, 교육을 통하여 그들 민족의 문화적 재보에 현실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또 다양한 사회적 유대로 말미암아 그들 민족의 생활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 그들은 또 그들 민족의 흥륭에 각자의 직업을 통해 기여하고 있으며, 자기 민족의 제반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 해결에 부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평신도는 각자의 민족에 속하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신앙과 성세를 통하여 교회 안에 새로 난 것이니 그리스도에게도 속한다. 그것은 그들이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활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Ⅰ고린 13,23 참조),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종속되어 마침내 하느님이 모든 것에 있어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이다(Ⅰ고린 15,18참조).”11)
이 인용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라는 이름의 인격적 적용의 열쇠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개념에 있다. 하느님 백성의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백성의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불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평신도는 이 공동체의 구성원이며 스스로 교회인 것이다. 하느님 백서으이 교회는 곧 평신도의 교회이다.
Ⅲ. 평신도직과 사제직 : 교회 안에서의 동격성
1) 사제와 평신도의 동격성 : 교계적 교회론의 극복
그렇다면 소위 사제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대두된다. 평신도가 왕직, 사제직, 예언직에 참여한다면 서품받은 사제는 누구인가? 한동안 공의회는 평신도와 주교의 품격은 잔뜩 상승시켜 놓고 사제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격하시켰다는 견해가 난무했다. 과연 이것은 옳은 견해일까? 이에 대한 답변은 평신도와 사제의 고유직은 무엇이며 서로 다른 고유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동격의 관계에 놓이게 되는지에 대한 옳은 이해에서 얻게 된다. 「교회헌장」 10항에서 모든 신자들은 일반적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것은 그 정도에서뿐 아니라 본질적이고도 교계적 사제직과 구분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은 언뜻 하느님 백성 안에서의 사제와 평신도의 위치와 권한에 대해 동등성을 관철시키려는 노력은 결국 헛된 것이며, 교계적 종속은 궁극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왜냐하면 평신도와 사제는 함께 하느님 백성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 정도에 따라서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도 구분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애매한 입장은 오히려 평신도와 사제의 서열(등급)을 존재적으로 더욱 강화시킨 결과를 낳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만 강하게 할 뿐이다. 평신도와 사제가 본질적으로 구분된다면 사제서품을 받은 사람은 서품을 받음으로써 과연 본질적인 변화를 일으켰다는 말인가? 사제와 평신도를 하느님 백성으로 포함시킴으로써 극복된 듯한 교계적 교회론이 결과적으로 무모한 것이고 평신도 사제직에 대한 공의회의 진술도 결국은 사탕발림이었다는 인상으로 실망을 안겨준다.
그러나 같은 「교회헌장」 10항에서 이런 의혹을 풀어 주는 공의회의 진정한 의도를 대하게 된다. 이 항목에서 우리는 교계적 교회론이 독특하게 극복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교회헌장」 10항은 사제와 평신도는 단지 교계적 정도에 따라 구분해도 좋다고 분명히 함으로써 이상의 의문은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함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 안에 여러 직무의 계층이 있다는 사실이 모든 크리스찬의 동등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 주는 것이다. 평신도 직무는 교계의 계층이 아니며, 오히려 여러 직무의 계층을 무시함 없이, 여러 직무 가운데에서 진실로 동등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주교나 사제도 평신도처럼 그리스도의 직무를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도 왕이며 사제이며 예언자인 것이다.
이렇게 「교회헌장」 10항을 비교계적으로 해석할 때 특수사제직(서품 받은 사제)을 교회 안의 특수층으로 여기면서 일반사제직을 평가절하하려고 했던 한 때의 시도는 잘못이었음이 판명된다.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그릴마이어는 이 공의회 문헌을 풀이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때 일반사제직에 대해서 일정의 평가절하를 시도하였다. 즉 이 일반사제직은 고유한 것이 못되며 초보적이며 또는 어떤 <일정한> 의미에서의 사제직, 그러니까 그 자체로서는 이 이름을 붙일 자격이 없는 사제직일 뿐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이런 해결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중략 - 1963년의 초안을 보면 보편적 사제직에 대한 이 표현을 공박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보편적>이란 모든 것을 포괄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해석은 비록 부적당하긴 했지만 신학위원회로부터 지지는 받았다. 이 위원회는 공통적 사제직이라는 표현을 채택하였다. 이 사제직에는 모든 세례 받은 사람들이 포함되며, 축성된 사제라 하여 이 공통적 사제직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하느님 백성의 모든 지체들에게 나타난 <공통적>이며 <일반적>인 사제직에 대해서도 정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12)
특수사제직은 일반사제직과 모순된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제직을 보증해 준다.
2) 본질적으로 사제와 평신도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교회
그러면 사제와 평신도 사이엔 구분이 전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교회헌장」 10항은 이 둘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13) 여기에 대한 답변 역시 그릴마이어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서품 받은 사제는 일반사제의 품위와 사명을 상승시키거나 강화시킨 것이 아니라, 일반사제에 대해서 사제직의 품위와 권위의 <새로운 양상>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일반사제도 축성된 사제로부터 기인한다. 그렇지만 특수사제와 일반사제는 특수한 양상으로,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일반적이거나 특수한 참여의 바탕위에서 서로 <동격>이다.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입장에서부터 사제의 두 양상이 보다 가까이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14)
그릴마이어에 의하면 일반사제와 특수사제가 동격의 관계를 가지면서 동시에 차이를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위격 때문이다. 먼저 이들이 동격의 관계를 나타내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하느님 백성을 교회 안에서 일치시키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모든 봉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봉사이며 집회도 그리스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교회구성원들 간의 일치도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제정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특수사제와 일반사제의 구분도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교회는 그저 하느님 백성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하느님 백성, 메시아적 하느님 백성, 공동체로서의 하느님 백성이다. 하느님 백성은 교회를 통해 그 역사적 동일성을 가진다. 하느님 백성은 개인적이든 전체적이든 - 인격적이며 또 제도적인 차원에서 볼 때 - 전 인류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효과있는 표시이다. 따라서 <특수> 사제의 과제도 교회의 본질에 속한다. 교회는 스스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인류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자이고자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 이끌어지고 거룩해지며 가르쳐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사제와 평신도는 각각 그들의 고유임무 안에서 교회를 위한 본질적인 존재이다. 교회는 세속의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전 세계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적으로 사제와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하나의 제도적 임무를 나눠 갖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교회 자체로서 그리스도 안의 하느님 백성의 성사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인격이 교회 실존의 신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제와 평신도의 과제가 본질적으로 구분된다고 강조하는 것은(교계적 본질이 아니라) 성사적 본질, 다시 말해 전 세계의 교회로서 교회 사명의 신비와 관련해서이다. 이에 대해 「교회헌장」 9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원조이시며 일치와 평화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한데 불러 모아 교회를 세우셨다. 이것은 교회가 모든 사람과 각 사람을 위하여 구원을 이룩하는 볼 수 있는 일치의 성사이게 하기 위해서이다.”15)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교회헌장」의 구성 편집자였던 벨기에의 쉬넨스 추기경은 「교회의 선교」라는 책에서 사제와 평신도의 사제직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교회 안의 필연적이며 가장 종교적인 사도직은 - 보통 사람들이 오랫동안 인식해 왔던 것처럼 - 성직자의 독점물이 아니다. 평신도의 의무를 <시간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만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사제만이 종교적 사도직으로 불리웠고 평신도는 단순히 지상적 범위 안에서의 역할만 적당히 하면 된다는 식의 안이한 생각을 갖게 한다. - 중략 - 교직자, 특히 사제는 세례 때 중재되었던 일반적 사제직과 관련시키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에 사제의 과제는 고립될 수 없으며 또 신도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정의될 수 없게 된다. 사제와 평신도의 일치는 신비체의 신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신비체 안에서 그 기능들이 서로 다르긴 하지만 분리되지 않고 있다. 하느님께서 묶어 놓은 것을 여기서 인간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16)
사제와 평신도는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의 신비이다. 이에 누가 이 교회의 이름으로 이야기하는가.? 라는 물음이 던져진다.
Ⅳ. 평신도 - 사제 협의회의 과제
지금까지의 기술을 종합해 볼 때 <하느님 백성> 개념은 교회를 인격적 공동체로 정의 내리는 가장 근본적 개념이다. 이 개념 교회를 역사 도정에서 만날 수 있는 어떤 실증적 단체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과제>로 이해하게 해준다.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하느님 안에 있는 인간 존재의 윤곽이다. 교회는 인간 존재의 모습이고 틀이며 인간이 되어야 할 원형이다.
이 과제는 교회 안에 모든 인간에게 해당된다. 그들은 모두 스스로 교회이므로 이 과제를 대변할 수 있다. 그들은 모두 교회의 이름을 보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의 모든 직무를 기능적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제와 평신도는 모두 교회에 봉사하고 이 임무를 수행한다. 한마디로 사제와 평신도는 그리스도 안의 모든 인간들의 협의체로서의 제도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 신학은 인격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러한 신학을 바탕으로 할 때 신분을 초월한 의미에서의 교회를 거론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교회가 제도로서가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인간들에게서 비로소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의회는 교회가 처음부터 한 형태로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그 존속의 다양한 양상을 지니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평신도사도직교령」2항 참조)17). 교회는 말하자면 그리스도 자신을 교회와 동일시 할 수 있으며 이는 교회 자체가 전 세계의 기쁨이요 희망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이미 인격적 공동체이기에 교회 안의 구성원도 제도적 관계가 아닌 인격적 관계로 얽히어 있어야 한다. 교회는 그 구성원들의 삶과 밀접히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세계에 대한 봉사는 구원의 성격을 띠어야 하고 인간들과의 전반적인 교제를 담당해야 한다. 그런데 아직 한국천주교회는 교회를 이렇게 인격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공의회의 이 교회관은 세기적 설계이다. 교회는 짧은 기간동안 전개되다가 사라지는 임시적 제도가 아니라 영구한 신앙의 전망이다. 이러한 교회를 거치지 않고서는 교회 안의 어떤 인간에게도 미래란 주어질 수 없다.
교회의 이런 인격적, 세속적 관점은 계속 수용되어야 한다. 평신도의 물음이 이러한 교회 물음의 중심을 이룬다고 볼 때 평신도의 물음은 바로 교회 존립에 대한 물음이며 교회 실존의 물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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