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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선교

도구 Ludovicus 2008. 10. 23. 07:08

 선교: 마르코 복음서 안에서 열두 제자의 부르심을 중심으로


  1. 서언:


  교회가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선교사로 파견되어 오랜 시간을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일, 곧 선교를 하다가 이역만리 타국에 뼈를 묻은 사람이고, 아기 성녀의 데레사는 15 세에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가서 24 세로 타계할 때까지 이국에서의 선교는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수녀원 담 밖을 벗어난 적도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 두 성인 성녀가 교회에서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되었다는 사실이 아주 의미심장하고 저에게는 선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며 교회가 선교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보여주는 표징으로 느껴집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하게 두 성인 성녀가 어떤 분이었는지 소개합니다.


  *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작은 꽃, 소화 데레사라고 불리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15세에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하고 24세의 나이로 천국에 들 때까지 9년 동안 가르멜 수녀원에서 기도하고 일하는 단순한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다른 수녀님들에 비해 삶에서 특별한 면도 거의 없었고, 그저 수도자로서 기도와 노동을 하는 평범한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특별한 사랑과 존경을 받는 성녀가 되었으며, 더구나 교회에서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되어 그녀의 천상탄일을 대축일로 지내게 되었는지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그녀는 일상적인 기도와 일, 투병으로 인한 시련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서 고통의 길을 걸어갔던 분입니다. 그녀는 겸손과 단순함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지니고 죽기까지 영혼들을 구원하고, 교회의 쇄신과 선교 지역에서 신앙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에 온 힘을 다하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한 글을 쓰도록 지시를 받았고, 그 후에 또 다른 생활 기록을 첨가하였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한 영혼의 이야기]입니다. [한 영혼의 이야기]를 보면 그녀가 어떻게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오롯이 바쳤고, 그녀를 온통 휘감았던 어둠 가운데서도 순명 정신으로 주님께 충실하였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로 이 책이 그녀가 가장 평범한 가운데서 얼마나 탁월한 영혼이었으며 어떻게 성녀로 시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되었는지를 밝혀줍니다.

  그녀는 처음 각혈을 하였을 때, 주님과 만날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았고, 믿음과 희망의 절정에 이르러서 1897년 9월 30일 숨을 거두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오, 저의 하느님,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의 소명, 마침내 저는 그것을 찾았습니다. 제 소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의 품 안에서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저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는 바로 이 사랑 때문에 그토록 열렬한 선교 정신을 갖고 기도하게  되었고, 기도의 모범으로 선교의 수호자가  된 것입니다.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성 이냐시오와 함께 예수회를 세운 초기 예수회 사부 중의 한 사람입니다. 예수회에서 처음으로 동방, 인도로 선교를 떠났던 분이지요. 교회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했고 그의 천상탄일을 대축일로 지냅니다. 그만큼 교회 안에서 하비에르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단히 놀라운 열정으로 선교를 펼치다가 과로로 병을 얻어 돌아가셨던 분이니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된 일은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그가 동방 선교를 위해 처음에 인도의 고아에 도착했을 때 할 일이 태산 같아 거의 잠 잘 시간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를 위해 더욱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계셨지요. 그에 따라 하비에르는 처음 파견 받았던 인도에서의 사목에 머물지 않고 미지의 땅을 향해 기꺼이 순례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의 전도 여행은 크게 4차 전도 여행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인도 남부 해안을 중심으로 한 제 1차 전교, 남태평양 말라카 (Malacca)와 몰루카(Moluccas)에서의 2차 전교, 일본의 3차 전교, 마지막은 실제 이루지 못한 중국 선교를 향한 4차 전교 여행입니다. 미완성으로 끝난 마지막 전도 여행의 한 장면을 묵상하노라면 동료 성 이냐시오의 함께 주님의 일에 동참하자는 권유에 냉소적이던 하비에르가 얼마나 온전하게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모되는지에 감동을 받게 됩니다.

  중국 대륙을 밟기 전 그가 도착한 곳은 상촨이라는 작은 섬이었습니다. 상촨에서 그는 작은 성당을 세우고 고백성사를 주고 환자를 방문하며 대륙으로 진출할 길을 모색합니다. 그러나 하비에르는 그 섬에서 죽음을 맡게 됩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6세로 소화 데레사보다는 거의 두 배는 살았지만 그래도 죽음을 맞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한창의 일할 나이였지요. 임종을 지켜본 동료 안토니오에 의하면 그는 죽음이 임박한 마지막 순간까지 이냐시오와 예수회의 형제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전합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주님과의 긴 대화를 끝내는 순간 안토니오는 그의 손에 양초를 쥐어주었습니다. 하비에르는 예수님을 부르며 평온한 가운데 자신을 하느님께 완전히 내어드렸다고 합니다.


  두 분이 전혀 다르면서도 공통점이 있지요.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깊이 일치하고 온전한 사랑을 드린 분들입니다. 저는 이 두 분을 통해 기도와 사랑, 이것이 선교의 핵심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 피정 강의를 준비했습니다. 처음에 강의를 준비하면서 계획했던 것은 이 두 성인 성녀를 중심으로 선교에서 기도와 활동이 어떻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지 풀어나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강의의 도입부로서 마르티니 추기경이 쓴 [성서 묵상: 마르코 복음서]에서 언급하는 먼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호수에서의 부르심’과 이어서 사도로서 선교에로 파견 받는 ‘산 위에서의 부르심’을 인용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도입부를 준비하면서 바로 이 내용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전체 피정 강의의 주제로 다루는 것을 다시 검토하게 되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가장 도움이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제가 처음에 생각했던 강의와는 전혀 다른 강의가 되었습니다.

  제 강의는 마르티니 추기경의 [열두 제자의 영적 걸음걸이- 마르코 복음]을 텍스트로 하여 선교의 핵심이 되는 제자와 사도에로의 부르심과 응답, 제자로서의 영적 여정을 중심으로 풀어나가겠습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마르코 복음서를 두고 예비자들의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상대적으로 마태오는 교리교사들의 복음서, 루가는 학자들과 박사들의 복음서, 요한은 원로와 영성가들의 복음서라고 명명합니다. 마태오는 교회 안에서 교리교사들에게 계명과 교리와 권고, 삶의 지침들을 제시해 주고, 루가는 계시와 신비의 구원적 차원을 깊고 넓은 안목으로 심화시켜 주고, 요한은 관상적이고 영성적인 경지에 이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깊은 신비와 영성적으로 통일된 관점을 보여 주고 있는 반면에 마르코는 교리교육 과정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예비자들의 복음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예비 제자나 제자들의 복음서라는 느낌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많이 사용하시지만 특히 마르코 복음서는 비유가 전체 내용의 주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마르코 복음서는 비유를 통해 독자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먼저 ‘외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이어서 ‘안으로’ 들어가 그 신비를 받아들이게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마르코 복음서를 통한 묵상에서 열두 제자들의 여정을 출발점으로 삼고 우리도 열두 제자들의 영적인 영정을 함께 걸으면서 우리 각자의 예수님을 따르는 내면의 영적인 여정을 살펴보자고 초대합니다.

  

  2. 마르코 복음서에서 열두 제자의 구절

  

  몇 가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마르코 복음서에 과연 열두 제자들의 여정이 나오는가? 더구나 그것이 선교의 여정으로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선교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따라갈 만큼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가? 과연 선교가 마르코 복음서의 중심 사상의 하나인가?

  마르코 복음서에는 열둘 (oidodeka)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고 열두 제자의 구절이라고 부를 수 있는 대목이 7 개가 있습니다.

  마르코 3장에 처음 이 단어가 나옵니다. “열둘을 뽑아”(3, 14)라는 표현인데 16절에 다시 언급됩니다. “이렇게 뽑으신 열두 사도는…….”

  두 번째 언급은 4장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의 뜻을 물었다.”(4, 10)

  세 번째 구절은 6장에 나옵니다, “열두 제자를 불러” (6, 7). 이 구절에서 3, 13에 나왔던 ‘부르다’라는 동사 ‘proskaleitai’가 다시 나온다는 점이 흥미롭다고 합니다.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부르셨다.” (3, 13)

  이 구절과 직접 연결되는 대목이 6장에 다시 나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열두 사도)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하고 말씀하셨다.” (6, 31)

  네 번째는 9장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몇 가지 가르침을 주시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9, 35)

  다섯 번째는 10장으로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시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고 가시며, 당신께 닥칠 일들을 그들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10, 32)

  여섯 번째는 11장입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것을 둘러보신 다음,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타니아로 나가셨다.” (11, 11)

  저에게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과 함께 베타니아로 가셨다는 대목은 깊이 숙고해 볼만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베타니아는 예수님에게 특별한 장소입니다. 마음을 나누는 친구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라자로와 두 누이 마리아와 마르타의 집이 있는 곳입니다. 마음의 친구들의 집에 가면서 열두 제자들이 함께 동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마음에 그리어보면,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을 단순히 제자들이 아니라 친구로 부르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를 이제 벗이라고 부르겠다고 하셨지요.

  마지막 일곱 번째는 14장, 바로 수난이 시작되는 대목입니다. 여기서는 열두 제자라는 언급이 자주 나오는데 수난 전체가 이 열두 제자들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는 까닭이라고 합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수석 사제들에게 팔아넘기려고 그들을 찾아갔다.”(14, 1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셨다.”(14,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로서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는 사람이다.’” (14, 20) “그러자,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실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다가왔다.” (14, 43)

  이상에서 살려 본 것처럼 마르코 복음서에는 ‘열둘’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사도단이 만들어지던 시점 (3장)부터 수난에 이르러 열둘 중의 하나였던 유다의 배반으로 사도단이 흩어지던 시점(14장)까지 복음서의 중요한 대목마다 이 열둘이 등장합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간략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열둘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공생활을 시작하시던 때부터 최후 수난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여정을 함께 걸었다.’저는 마르티니 추기경의 이‘함께 걸었다’는 표현이 퍽 마음에 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여정을 열두 사도와 함께 걸으신 것입니다. 바로 친구로서 동행한 것입니다. 최성수의 노래 제목에 ‘동행’이 있지요.

  사설입니다마는 제가 번역한 책 제목의 하나의 ‘동행’입니다. 원제는 ‘We walk the path together'라는 책인데 저는 이미 최성수의 노래 제목으로 ‘동행’이 있기 때문에 ‘우리 함께 길을 걸으며’라는 제목으로 출판사에 주었는데 출판사에서 ‘동행’으로 하고 영어 제목을 함께 넣으며 좋겠다고 하여 ‘동행’이 되었지요.

  예수님이 선교단을 만드셨다면 누구와 함께 선교단을 만드셨을까요? 분명하게 바로 이 열둘이지요. 그런데 이 열둘을 단순히 제자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부르시고 함께 선교단을 만드신 것입니다. 사실 저는 선교를 한다는 것은 바로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미션’아시지요? Mission을 우리말로 옮기면 바로 ‘선교’이지요. 거의 모든 분들이 영화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영화 ‘미션’에서 예수회 신부들이 한 일은 다만 원주민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듯이 친구가 되어 주면 자연히 선교가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시 사설을 조금 하지요. 며칠 전에 비신자 두 분을 포함한 몇 분들과 술자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비신자인 그들에게 저를 만나게 하여 신앙으로 이끌어 주고 싶은 어느 분의 주선으로 마련된 자리였지요. 함께 술을 마시다보니 서로 통하는 것이 있었는지 비신자 한 분이 대끔 저에게 ‘우리 친구 하자’고 하더라고요. 술자리를 마련했던 신자 분은 자기 친구가 신부인 저에게 친구하자고 하니까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지만 저는 아주 기분이 좋아서 즉시 그러자고 했지요. (신부 친구가 되었으니 그들이 이제 예수님 믿지 않고 못 배기겠지요. 하하.)

  

  마르티니 추기경의 묵상의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구심점으로 삼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3장 14절입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마르, 3, 14)

  이 대목에서도 가장 중요한 구절은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입니다. 그런데 원문을 보다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단순히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보다는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려고‘라고 해야 합니다. 열둘을 사도로 뽑으신 이유가 세 가지 (함께 있음, 복음 선포, 마귀 쫓아냄)로 첫째가 바로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열두 사도의 모든 역할은 그들의 존재 이유,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으려고'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모든 것은 바로 이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깊여 나가는 일입니다. 아주 쉽게 풀어서 말하면, 우리가 선교를 한다고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님이신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친구가 되는 일입니다. 그런 연후에 파견을 받고 복음을 선포하며 마귀를 쫓아내는 등의 선교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후에 상세히 다루게 됩니다.


  3. 제자들의 무지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려고’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계시되고 그들을 통해 어떻게 선교가 이루어지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이것을 다룬 장의 소제목을 ‘제자들의 무지’라고 붙였습니다. 이 장이 우리의 무지를 아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우리 내면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우리 자신의 무지를 깨달으며 그분이 새롭게 정화시켜 주시도록 청합시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제자가 되는 여정으로 이끄는 교육은 그 목표가 외적인 인간에서 내적인 인간으로 변모되게 만드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에서는 ‘외적인 인간 또는 바깥 사람’이라는 표현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관하여 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쉽게 말하면, 아직 신앙을 갖지 못한 비신자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오로는 공동체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문제를 언급하면서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깥 사람들을 심판하는 일은 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심판할 사람들은 안에 있는 이들이 아닙니까? 바깥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1 코린 5, 12-13)

  콜로사이서에서도 아직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좋은 말의 표양을 보이라고 권고하면서 같은 표현을 씁니다.

  “바깥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처신하고 시간을 잘 쓰십시오.” (콜로 4, 5)

  테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도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면 바깥 사람들에게 품위 있게 처신할 수 있고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1 테살 4, 12)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바깥 사람, 외적인 인간이라는 표현은 신약성서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표현이고 아직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고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였습니다.

  저는 과연 우리가 세례만 받으면 바깥 사람이 아닌 안의 사람, 내적인 인간으로 변모되는가에 대해 의문을 지닙니다. 외적인 인간이라고 할 때, 저는 오히려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만 지칭하지 않고 내면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참여하지 못하고 늘 겉도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주일에 성당은 나가서 미사 참례는 하지만 삶에서 내적인 변화로 기쁨이 없고 신앙이 형식적인 의례에 머문다면 우리도 아직 내적인 인간, 안의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내적인 인간이 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마르티니 추기경에 의하면, 우리의 무지를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내적 인간이 되는 길, 예수님을 내적으로 친밀하게 아는 길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보지 못함을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마르코 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의 한 대목을 인용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 12)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던 구절입니다. 번역된 말 그대로라면 도대체 말이 안 되지요.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못 알아듣고 용서받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들려주신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비유는 더 알기 쉽게 예를 드는 것이지요. 마르티니 추기경의 해설에 의하면, 이 구절은 귀를 막고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하는 표현양식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정말 들을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을 보시며 예수님께서 한탄하신 표현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 무조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을 보면, 보기는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의 처지가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는 것에서 알아보는 것으로, 듣는 것에서 알아듣고, 깨닫는 것으로 변모될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계속해서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고 알아들어라 는 초대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직까지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한 마디로 말해, 그들의 무지를 스스로 인정하고 깨닫기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말씀을 경청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전반부에 제자들의 무지를 지적하는 대목이 여러 번 나옵니다. 이 무지가 실은 제자로서의 길, 제자 됨의 영적 여정의 출발점이 됩니다. 열두 제자는 이 무지를 계기로 하여 예수님의 부르심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고 응답을 드리게 됩니다.

  마르코 4장에는 깨달음으로 초대하시는 말씀들이 더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절이 있지요.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4, 23) 이어지는 24절에서는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40절에서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6장에서도 그들의 무지를 지적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입니다.”(6, 52) 8장에서는 마치 심한 꾸지람처럼 들리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9장에 마지막을 제자들의 무지와 몰이해를 언급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9, 32)

  이런 말씀들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무지와 거기에서 출발하여 당신이 누구신지 알아보는 깨달음을 촉구하십니다. 이것이 제자가 되는 길의 여정에서의 첫걸음입니다. 알아듣고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게 마련입니다. 내면 안에서는 아직 말씀의 핵심에 다다르지 못하고 아렴풋이 알 것 같은데 그 신비를 다 파악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게 해 주셨지만 (4, 11) 아직까지는 그 신비를 다 알아듣지 못하고 파악하지 못한 까닭은 제자 됨의 여정을 다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위에서 살펴 본 이런 말씀들은 바로 제자 됨의 여정에서 아직은 갈 길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열두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도 여전히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다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내면의 마음가짐을 취할 때 우리도 귀를 기울려 겸손하게 들으려는 자세를 갖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첫째, 우리가 제자 됨의 여정을 따라 걷고자 한다면, 나아가서 파견을 받고 선교의 길로 나아가려고 한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알아들으려는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 무지가 구체적으로 어떤 무지이고, 그 무지가 어디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제자들의 무지가 드러나는 몇 대목을 추려서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먼저 2장의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는 일화를 듭니다. 이 일화에서 부각되는 점은 무엇인가?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참 자유에 대한 무지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2, 25)

  예수님의 나무람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율법이나 규정, 관례 등에 매여 있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질책을 당한 것입니다. 율법과 관습에 매여서 참 자유를 누리는 못하는 무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법 등의 규정에 매여서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신비가 드러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다윗의 예를 드시면서, 다윗은 정말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간과해도 좋을 지엽적인 것인지 알았기 때문에 규정에 매이지 않았다고 설명하시면서 하느님 자녀들이 누리는 참 자유에 대해 말씀하시고 외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면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일화는 이어지는 3장에 나옵니다.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는 대목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마음의 화를 감추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고 말씀하셨다.” (3, 5)

  예수님을 화나게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시려는데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고 물으시는데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거기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까? 우리도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마음속의 생각은 한 마디도 비치지 않고 교회가 어떻게 하는지 마음속으로 비판하면서 지켜보는 태도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일을 바깥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고 비판을 하는 일이라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지만 실제로 일에 관여하거나 말려들 생각은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은 결코 어떤 희생도 치르지 않고 비판적인 입장만 취하려는 사람들의 태도이고, 세례는 받았지만 마음으로는 아직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바로 그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질책을 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마르코 복음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판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지가 어느 정도까지인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를 들려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3, 21)

  예수님을 미치광이로 몰아 부칩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이들이 오늘날 예수님처럼 정신 나갔다는 말을 들을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표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리스도교의 신비에 가까이 가 보고 싶지만 괜히 잘못 발을 들여놓았다가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예수님의 신비에 너무 깊이 들어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우리 중에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가고 그리스도를 믿고 살기는 하되,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을 정도만 적당히 믿겠다는 태도랍니다. 남들이 혹시 우리를 교회에 미친 사람이라고 할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광신도가 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저는 가족에게 소홀히 하면서 레지오 활동한다고 매일 교회에 가서 사는 것은 반대합니다. 가정이 더 중요합니다. 가정을 돌보는 일과 교회에 봉사하는 일 등에 균형 있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분별이 아주 중요하지요. 그러나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에 너무 지나치게 마음을 쓰는 것은 기우입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이 여기서 말하려는 요지는 우리가 복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때로는 미쳤다는 소리도 듣기 마련이고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당하신 운명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당하셨다면, 예수님을 따른 제자인 우리도 당하기 마련이지요. 그러니 때로 미쳤다는 소리 들어도 너무 억울해 하지 마십시오.

  제자 됨의 여정에서 잘못된 것으로 지적되는 또 하나의 일화는 4장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는 씨앗, 돌밭에 떨어져 타버린 씨앗,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숨이 막힌 씨앗이 나오고, 이어서 그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해설하고 있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씨앗의 의미는 하느님의 신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러 가지 정황들을 말합니다. 사탄의 방해, 환난이나 박해,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등으로 풀이됩니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들입니다. 이런 마음의 태도가 모두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원인들입니다. 우리는 결국 우리의 마음을 열지 못하는 태도가 원인이라는 것을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압니다. 가시덤불로 상징되는 세상 걱정, 다시 말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이 어떻게 될까 불안해하는 마음은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부딪히는 가장 일반적인 장애입니다.

  제자들의 무지를 지적하시는 말씀이 4장에 다시 또 나옵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예수님께서는 옹졸한 마음, 열려 있지 않은 마음을 지적하십니다. 가능한 한 최소로만 하고 지나치게 말려들지 않고, 어느 선을 그어놓고 거기에 만족하려는 태도에 대한 지적입니다.

  7 장에서는 하느님의 신비를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는 태도들을 열거하십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7, 20- 23)

  여러 가지 악덕이 지적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잡아야 하는 것은 바로 마음속이라는 말씀입니다. 사회의 문제, 체제의 문제, 제도의 문제 등이 있겠지만 모든 것이 실은 인간 마음의 문제라는 지적입니다.

  우리는 간략하게 마르코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하는데 우리의 무지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이 무지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고백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주신다고 합니다. 마르코 복음서를 보면, 이 기쁜 소식이 먼저 병자들에게 전해집니다. 병자들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필요조건이 먼저 자신의 약함, 무지함, 도움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복음을 경청할 여지가 없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2, 17)

  아이로닉하게 들리겠지만, 무지, 약함, 불완전이 오히려 처방이 되는 셈입니다. 우리가 약하고 무지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말씀’과 ‘하느님의 신비’를 향해 나아가고 이해하는 첫걸음이 됩니다. 무지가 잘못이 아닙니다. 무지를 안정하지 않는 것이 잘못입니다.


  4. 예수님의 부르심


  이제 이 피정강의의 핵심인 제자와 사도로 부르심에 대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부르심이 나타나고 있는 이 대목들을 마르코 복음서의 고유한 신학적 안목에 비추어서 제시하겠다고 합니다. 신학적이라는 말에 미리 겁먹지 마십시오. 제가 알아듣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단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신학적으로 치밀한 작업을 거친 일정한 도식에 맞추어 넣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 깊은 의미를 담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고 합니다. 최근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마르코 복음서의 구조 안에서 ‘열두 제자의 부르심’에 대한 내용이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연구에 의거하여 부르심에 관한 텍스트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면, 전반부는 ‘호숫가에서의 부르심’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후반부는 ‘산 위에서의 부르심’이라고 붙일 수 있다고 합니다.


  1) 호숫가에서의 부르심

  최초의 부르심은 호숫가에서의 부르심입니다. 아래의 질문을 던지고 하나씩 간략하게 답변해 나가면서 내용의 핵심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 부르심이 어느 장소에서 일어나는가? 예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 부르시는가?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람을 부르시는가?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로 사람을 부르시는가? 그 부르심의 결과는 무엇인가?


  가) 부르심이 어느 장소에서 일어나는가?

  한 마디로 호숫가에서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것을 세 차례나 거듭해서 언명함으로써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1, 16) 이어지는 야고버와 요한의 부르심도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버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1, 19) 2장에서도 장소의 배치는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 (2, 13)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잇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2, 14)

  그러면 마르코 복음사가가 표상하고 있는 ‘호수’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호수는 당시 사람들의 삶의 터전입니다. 갈래레아 사람들이 살고 일하는 장소가 바로 호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일하고 노는 장소에서 당신의 사람들을 찾고 부르십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온갖 길을 두루 다니시면서 사람들이 있는 그 자리에서 당신의 사람들을 찾고 부르시는 것으로 소개합니다.


  나) 예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 사람들을 부르시는가?

  마르코 복음사가는 거듭 반복하면서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각 사람들의 삶의 터, 일터, 삶의 현장에서 부르십니다. 언제나 상황이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1, 16) 그들은 호수에서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습니다. 어부로서 그물을 던지는 구체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버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이렇게 야고버와 요한은 그물을 손질하여 고기잡이 일의 마무리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레위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2, 14) 레위의 직업이 세관원이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관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었다는 구체적인 상황을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실 때, 그 사람들은 바로 삶의 터, 일터에서 날마다 하는 바로 그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주 흥미 있는 사실입니다.

  마르코 복음서가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에서, 바로 구체적인 상황, 사람들이 처해 있는 그 상황을 보시고 그곳으로 찾아가셔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어부처럼 보잘 것 없지만 떳떳한 일을 하는 상황인 사람도 있지만, 세리처럼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격한 열혈당원도 있지요. 예수님께서 보시는 것은 외적인 직업이나 지위나 고정 관념이 아닙니다.

  이런 맥락을 놓고 우리의 처지를 돌아볼 때, 우리는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 가정이나 환경이나 사회적으로 각자 다른 상황이지만 바로 우리가 살던 그 장소에서, 우리가 놓여 있던 그 상황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초대하셨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살던 바로 그 장소에서 우리를 찾으셨고, 우리를 부르셨고, 레지오 마리에 활동을 하도록, 선교의 삶을 살도록 초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고 우리가 선교를 한다고 할 때도 이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선교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 그분이 하십니다.


  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사람을 부르시는가?

  아주 개인적이고 내밀한 방법으로 부르십니다. 먼저 친근하게 말을 거시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십니다. 시몬과 안드레아를 보시고 먼저 다가가셔서 말을 거시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야고버와 요한을 보시고 가까이 다가가셔서 말을 건네시고 다정하게 부르십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를 보시고 말을 거시고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시고 세리로서 받는 마음의 상처에 깊은 위로를 주시고 다른 길이 있음을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도록 초대하십니다. 물론 간결하게 사건만을 다루고 있는 복음서에 상세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분이 어떻게 사람을 부르시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다가가십니다. 각자가 있는 장소,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들으시고 새로운 희망을 주시면서 당신에게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라)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로 사람들을 부르시는가?

  마르코복음서에는 아주 단순하게 포괄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내 뒤로 오라.”가 된다고 합니다. 당신의 뒤를 따라오라고, 당신이 걸어가시는 길을 따라 밟으라고 부르십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의 해설에 의하면, 당신에게 한없는 신뢰를 바치라고 부탁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신뢰에 온전한 의탁을 드리는 것이 제자 됨의 여정에서 필수적인 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관해서 들어서 알았지만 이제 뒤를 따라가서 같이 머물도록 하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인간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완전한 헌신이 요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저런 일을 하기 위해서 당신을 따라오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냥 와서 온전히 당신께 의탁하라고 부르십니다.


  마) 그 예수님의 부르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마르코 복음사가는 사람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고 따라나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시몬과 안드레아의 경우 (1, 18)도, 야고버와 요한의 경우도 (1, 20), 레위의 경우도 (2, 14) 그 반응은 바로 그 자리에서 즉시 일어납니다. 처음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우리 각자의 삶이 얼마나 변화되었는가를 의식시켜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최초의 부르심은 세례 사건이지요. 세례에로의 부르심이 모든 부르심의 중심이고 이어서 다른 부르심이 일어납니다. 세례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구체적으로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 해욱이, 너 요셉아, 영자, 너 데레사야, 등등 우리 각자에게 불러주신 그 이름으로 우리를 당신과 하나로 결속시켜 줍니다.


  2) 산 위에서의 부르심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부르심의 둘째 양식은 ‘산 위에서의 부르심’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무슨 의미인지 살펴볼 차례입니다. 마르 3, 13-19 이 이 부르심의 양식을 담고 있는 텍스트인데 내용이 집약되고 있고 훨씬 풍부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텍스트를 앞부분에서 따로 떼어놓고 뒤에 이어지는 텍스트에서도 따로 분리시켜서 뚜렷이 부각시킨다고 합니다. 먼저 텍스트 자체를 천천히 읽고 음미해 보고, 그 말씀의 풍부한 의미를 하나씩 검토해 보기로 합시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버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3, 13-19)


  마르코복음서의 구조 전체에 비추어서 살펴보면, 한 마디 한 마디가 아주 뜻 깊다고 합니다. 이 텍스트는 그 정경이 그 앞과 뒤의 부분과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13절과 20절에는 장면을 전환시키는 말이 나옵니다.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는 광경이 나오고 20절에는 그분이 이제 집으로 가셨다고 서술합니다. 말하자면, 앞과 뒤에서 각기 다른 장소가 택해지고 그 가운데서 아주 중요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13-19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앞 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호숫가에서의 부르심처럼 사람들의 삶의 터, 일터, 현장에서 일하는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께로 모여드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의 인품과 그분의 말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모여드는 정경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3, 7-8)

 지치고 힘든 영혼들, 병들고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갈릴래아와 유다 지방뿐만 아니라 멀리 이방인들의 지역에서까지 몰려들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예수님께로 온갖 사람들이 모여오는 장중한 광경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산에 오르십니다.

  산으로 오른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산은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당신이 알기로 ‘오른다’ 라는 표현은 특히 기도하려는 순간에 찾는 고독을, 다시 말하면, 다른 것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루가 복음사가는 분명히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따로 떨어져서 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는 모습을 그리지만,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다른 배경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들이 당신을 찾아왔는데 그들을 버려두고 따로 떨어져서 기도하시러 올라가시는 것은 상상할 수 없고, 호숫가에 계시던 예수님이 천천히 언덕으로 오르시는 장면을 그려보면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그 지형이 그대로 남아 있어 성지 순례를 다녀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호숫가로는 작은 구릉과 언덕들이 이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산은 높은 산이 아니라 바로 호수에서 이어지는 언덕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천천히 그 중의 한 언덕으로 오르시고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릅니다.

  산, 말하자면, 그리 높지 않은 언덕 위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시고 큰 소리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제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 위에서의 그분의 부르심은 교회의 선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당신을 따라오는 많은 무리들 중에서 당신의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하나씩 장중하면서도 신비로운 음성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에 의하면, 산으로 오르시는 행위는 다른 신학적인 의미도 있을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적인 선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호숫가가 아닌 산 위에서의 부르심이지만 사람들이 없는 외딴 곳에서가 아니라 당신에게 모여 온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마음에 두셨던 사람, 열둘을 선택하시어 부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을 묘사하는 문체에서도 그 선택이 사도적이고 교회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3, 13)

  이 대목에서 세 가지 시제가 달리 쓰이고 있다고 합니다. ‘부르신다’라는 뜻의 동사 proskaleitai 는 현재형이고, ‘원하시던’이라는 뜻의 ethelen이라는 동사는 반과거이고, ‘나아왔다’라는 뜻의 동사 apelthon은 아오리스트 용법 (아오리스트는 희랍어의 특별한 문법 용어인데 어떤 사건(행동)의 발생에 내면적인 것에 관계없이, 밖에서 볼 때 하나의 전체적인 것으로서의 사건(행동)을 나타내는 시제입니다. 따라서 아오리스트는 진행중인 과정으로서의 행동(사건)을 표현하는 현재와 완료에 대조됩니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실 때, 현재형으로 부르십니다. proskaleitai라는 동사는 마르코 복음사가의 고유한 어휘로 그는 9 번이나 이 동사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 동사가 나타내는 구체적인 상황은 무엇인가? 그 행위는 아래에서 그리고 있는  정경을 상상하면서 이해할 때 바르게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많은 군중들 가운데서, 병자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대는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열둘의 이름을 부르시고 이름이 불린 자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아왔습니다.

  외관상으로도 이 동사가 몇 개의 명사와 결부되면서 장중한 운율을 띠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이 동사는 ‘부복’이라는 이미지를 띠고 있습니다. 권위를 지닌 자가 누구를 부르고 거기에 부복하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같은 이미지를 담고 쓰인 대목이 15, 44이라고 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서 벌써 돌아가셨는지 의아스럽게 여겨서 자기 수하에 있는 백인대장을 불러 묻는 대목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불러 묻고 보고를 들을 때 아랫사람이 나아가는 상황입니다.

  ‘부복’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우선’이라는 어감도 함께 담고 있다고 합니다. 선택을 받은 이 부르심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예수님과 각별한 관계, 우선적인 호의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분이 당신이 원하시던 이들을 부르십니다. 당신이 원하시던 이들이라는 의미가 단순히 당신 마음에 들던 사람들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에 담고 계시던' 이라는 어감을 띠고 있다고 합니다. 

  간략하게 요점만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던, 당신의 마음에 담고 계시던 사람들을 특별히 따로 부르십니다. 이 강조는 ‘당신이’라고 번역되는 autos라는 단어에 새삼 드러난다고 합니다. 문법적으로는 굳이 넣어야 할 필요가 없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가 없어도 문장의 의미가 뚜렷한 데도 불구하고 그 단어를 넣음으로써 ‘당신이 원하시던’사람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자격이나 매력이나 직업이나 지위나 전혀 상관없이 오로지 예수님 당신이 마음에 두신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선택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 당신이시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선택을 하는 행동의 동기가 됩니다.

  이제 드디어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있습니다.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3, 13)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대목에서 앞에 쓰던 ‘(그분을) 뒤따랐다’라는 동사를 쓰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분 뒤로 나아갔다’라거나 ‘그분을 뒤따랐다.’라는 동사를 쓰지 않고 ‘그분께로’ 즉, 그분 곁으로 ‘나아갔다’라고 표현합니다. 전치사 pros가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사와 함께 쓰이는 일은 아주 드물다고 합니다. 사람이 어떤 장소로 나아가는 것을 나타내는 전치사는 주로 eis가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굳이 pros를 쓰고 있는 것은 서로 사이에 이루어지는 친밀감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따라서 pros auton은 누구에게 나아가는 것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누구와 더불어 함께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apelthon, 곧 ‘나아갔다’라는 동사를 골라 쓰고 있다고 합니다. 희랍어 동사 ‘가다’에 접두어 apo를 붙이면 다른 장소로 가기 위해서 어느 장소를 떠남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사도들은 부르심을 받고 이제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있기 위해서, 자기들이 무리 가운데 있던 자리를 떠났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이 대목에서 인간의 내면적인 자세를 나타내는 동사, 예를 들어, ‘복종하였다’같은 어휘를 쓰지 않고 자기 위치를 떠나서 그분이 계시는 곳으로 ‘나아갔다’라는 동사를 쓴 것은 흥미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이것은 내면적으로 예수님께 귀의하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계시는 그 위치로 들어섬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것이라고 해설합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였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쫒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3, 14-15)

  이어서 14절에 나오는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라는 문장은 희랍어로도 아주 이상한 문장이라고 합니다. 새 성경 번역이 ‘열둘을 세우시고’로 했는데 원문의 의미는 ‘새롭게 만들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열둘을 세우시거나 새롭게 만드신 까닭은 무엇인가?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새 성경에서‘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라고 옮겼습니다마는 원문의 의미는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려고’라고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기 위해서 라는 목적어에 걸리는 것이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열둘을 세우신 목적이 세 가지가 되는 것이지요. 첫째가 바로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신 목적의 핵심입니다. 먼저 그분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직접 몸으로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그분과 함께 머물면서 동고동락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붙잡히셨을 때, 가야파의 하녀가 베드로를 보고서 “당신도 저 나자렛 사람 예수의 제자이지요?”라고 묻지 않고, “당신도 저 나자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지요?”라고 말한 것을 상기해 보면, 함께 있음의 의미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제자가 아니라 사도로 불림을 받는 특성은 지성으로 예수님께 귀의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함께 있음’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사도로 부르시는 첫째 목적입니다. 이 표현이 계약에서 사용하는 전형적인 어법으로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있다.”라는 문장으로 표현된다는 것을 이해하면, 그 내용이 의미하는 바가 더 깊게 다가올 수 있겠습니다. 단순히 함께 함으로써 새 계약의 백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분을 따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순종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실제 몸으로 함께 있음이 그분이 사도로 부르시는 선택의 목적이라는 것을 새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 있음’에 뒤이어서 열둘을 세우신 두 번째 목적이 나옵니다.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입니다. 단순히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깊이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선포하라고 파견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관계에서 언제나 이니시어티브, 주도권은 예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10, 15절에서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셔서 선포하게 만드신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선포한다는 말입니까? 바로 그분을 두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왜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하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분을 두고 선포해야 하는 까닭에 그분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을 전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을 속속들이 알고 그 다음에 바로 그분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저도 강조해서 말씀드립니다. 선교를 한다는 것이 단순히 말로 듣고 배운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선교가 개인적인 체험을 통한 증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몸으로 예수님을 알고 사랑해야 그분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써 자연히 뒤따르게 되는 일이면서 부르심을 받은 셋째 목적이 ‘마귀들을 쫒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마귀들을 쫒아낸다’라는 뜻의 exousian이라는 동사는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열두 사도에게만 쓰이는 동사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열두 사도만 특별히 그 권한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1, 22에 의하면, 예수님은 권위를 지니신 분으로서 사람들을 가르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귀들을 쫒아낸다’라는 어휘가 마르코 복음사가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를 쫒아내는 행위’, 곧 구마와 그것으로 상징되는 행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세상 안에서 악과 벌이는 싸움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중요한 일이 바로 이 악과의 싸움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당신이 부르신 사도들을 그 일에 참여시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선교에 파견하시는 장면에서 같은 문장이 다시 나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 7)

  마귀를 쫒아내는 일과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5. 결어:


  묵상의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마르 3, 14-15를 볼 때, 과연 열두 사도가 해야 했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파견 받아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쫒아내는 일이었습니다. 마르 6, 12-13에 그들의 선교활동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쫒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레지오 마리에 단원으로써 선교의 사명을 받았다면, 우리는 어떤 선교 활동을 해야 합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이며 동시에 선교를 하도록 파견을 받은 선교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사도들처럼 예수님께 전해들은 것을 단순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과 함께 머물고 그분을 몸으로 속속들이 알고 그분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도 우리가 선교를 한다고 할  때, 먼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 그분과 함께 머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몇 마디를 들어서 알고 그것을 흉내 내어 전하기 위해서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인격에 매료되고 그분의 삶과 행동양식을 체득하고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바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과 행동이 담겨 있는 복음서를 묵상하고 관상하는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그분을 알고 사랑할 때만이 우리는 그분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의 핵심은 기도와 사랑입니다. 레지오 마리에에서도 기도가 먼저 우선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활동이 이루어지지요. 기도와 활동, 둘 다 중요하지만 그 순서는 명백합니다. 기도가 먼저이고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서 친밀하게 알게 되고, 그분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그분을 따르고 그분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출처 : 직암선교회
글쓴이 : 안젤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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