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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느님께로 향한 회심의 길 / 문규현 신부

도구 Ludovicus 2008. 10. 20. 06:51

 

문규현 신부님 블로그에서 옮겨왔습니다. http://blog.daum.net/paulmun21

 

 

하느님께로 향한 회심의 길 

10월 19일 연중 제29주일 묵상



이번 주에는 드디어 충청도로 넘어왔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여 있으면  올해 마지막 목적지인 계룡산 중악단에 오릅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더불어 순례길을 가고, 더불어 기도하고, 더불어 간절히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구하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사도 바오로는 ‘피차에 사랑의 빚 말고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 하셨는데 순례길이란 게 온통 사랑의 빚을 지고 다니는 셈이어서 도리어 민망합니다.


이 길에는 사랑의 빚 말고도 아름다운 만남과 말씀의 성찬, 그리고 풍성한 축복이 늘 기다리고 있습니다. 입소하는 막내아들 데리고 연무대 왔다는 초등학교 동창생도 만났습니다. 12살 샘이는 오후 반나절을 저희와 함께 오체투지를 했는데 전날 밤 엄마 몰래 썼다는 예쁜 편지도 살짝 주고 갔습니다. 편지에는 “신부님이 하시는 오체투지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힘이 되길 바랍니다. 무릎 아프지 마시고요. 저 결혼식 때 주례 꼭 서주세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럴 마음 없는데 어쩔 수 없이 오래 살아야겠습니다.

 

50중반의 한 아낙이 장성한 딸과 함께 저희를 찾았습니다. 아낙은 순례단이 “자신들이 지고가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분들이다. 자신들의 욕심과 사악함을 비우라고, 자신들더러 더 이상 죄짓지 말고 살라고 오신 것 같다"고 연신 성호를 그으며 눈물을 지었습니다. 심지어 저희를 ”살아있는 예수님“이라며, “성경 속 예수님을 이렇게 길에서 만날 줄 정말 몰랐노라“고까지 말하는 탓에 참으로 몸 둘 바를 몰라야 했습니다.


그 촌 아낙이 무슨 죄를 지었겠습니까. 혼자 자식들 키우느라 아등바등 했을 그이가 욕심을 내면 뭘 얼마나 내었겠고, 낼 수 있었겠습니까. 자식들하고 생존하기 위해, 그리고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낫게 살아볼까 조바심 냈을 그 무엇을 ‘욕심’이라고 고백하는 그 순한 얼굴의 아낙. 그이 말은 그 무슨 강론이나 설법이나 가르침보다 가슴 깊이 파고들었으니, 저희는 큰 힘을 얻고 다시 신나게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 시각, 정치권에서는 영농 직불금 문제로 난리가 난 터였습니다. 수많은 농부들이 자살하고 영농비도 건지지 못하는 농사로 허덕이는 때에, 진짜로 땀 흘리고 수고하는 농부들의 것이어야 할 땅을 소유한 것도 부끄러울 마당에, 가난한 소작농들이 받아야 할 돈을 가로채다니 탐욕도 이런 구질구질한 탐욕이 없습니다. 더구나 그런 자들이 그토록 많다니 놀랍기도 참 놀랍고, 썩어도 너무 썩었습니다. 투기와 위선으로 치장한, 참으로 형편없고 되먹지 못했으며 치졸한 자들입니다. 타락과 부패, 도덕불감증과 물욕에 절은 자들로 나라 구석구석 악취가 진동합니다.


그런 자들이 공직에 있고 지도층 행세를 하고, 권력과 부를 쥐고 약자 위에 한없이 군림합니다. 이토록 엉망이고 비정상인 사회가 멀쩡히 굴러간다면 그게 도리어 희한하고 이상한 것 아닙니까? 앞선 말씀드린 소박한 촌 아낙의 고귀한 성찰과 통찰에 견주면, 이런 가진 자들의 삶이란 게 얼마나 초라하고 추하고 부끄러운 것입니까.


영농 직불금말고도 도둑놈 심보로 갉아먹고 있는 또 다른 사례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도덕이 밥 먹여 주냐며 부도덕과 불의를 눈감아주고 그런 사람들을 지도자로 뽑은 것이 많은 국민들입니다. 그에 편승해서 부스러기라도 슬쩍 주어보려던 어처구니없고 부질없는 마음들이 지금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도덕은 밥도 먹여주고 영혼도 풍요롭게 하며 사회를 건강하고 힘 있게 지탱하게 해주는 원천입니다. 그 진리를 이제라도 뼈저리고 뼈저리게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어제는 한 할배가 길을 오더니 저희 모습을 보고 땅 꺼지는 탄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배는 자기 동생도 출가한지 20년이라 합니다. 출가를 말리고 말렸건만 그렇게 떠나버린 뒤 지금껏 아무 소식을 못 듣고 있답니다. 허니, 동생도 이렇게 스님이나 신부님처럼 길을 다니는 성직자가 되어 있어, 길에서라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냐 좋겠냐 합니다. 저희더러 고맙다고, 마음이라도 함께 하고 싶다며 동생에 대한 진한 그리움과 기대를 풀어놓았습니다. 할배는 저하고 동갑내기랍니다. 그래도 자기 마을에선 자신이 제일로 젊은 축으로 농사꾼이 멸종 지경이라는 겁니다. 후원금을 내놓았던 그 ‘젊은’ 농부는 갔다가 다시 돌아와 저희에게 쌀 한 포대까지 선물했습니다.


“늙은 군인들이 무슨 잘못을 해서 이리 기합을 받는가?” 군인들을 많이 보는 지역이어서 그런지 할매들이 저희를 보고 이렇게 걱정스러워 했습니다. 순례기도가 겉으로 보여주는 무거움과 엄숙함, 고됨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말이었습니다. 웃음을 터트리게 만드는 이 할매들의 천진함과 따뜻한 마음이 또 우리를 빵빵하게 재충전해줍니다. 자벌레에 거렁뱅이에 노숙자에, 무식하고 바보스러우며 미련 맞은 사람들에, 이제는 늙은 군인이라는 호칭이 추가되었습니다. 자고로 미래세대에게 건강함과 희망을 심어주지 못하는 이런 염치없는 시대를 만든 늙은이들은 죄다 거리에 나와 통렬한 참회와 고백의 시간을 가져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도 군인마냥 빡세고 치열하게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선교사입니다. 천박한 세태를 따라 교회의 크기와 권력을 키우는 일에 기웃거리고 탐닉하는 것이 결코 선교일 수 없습니다. 길에서 나시고, 늘 길에 계셨으며, 길에서 사람을 만나고 위로하고 치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영혼을 따르는 것이 참된 선교입니다. 순례단이 길 위에서 만나는 소박하고 선한 사람들, 그들이 성자이고 예수님의 참 제자들입니다. 바로 여러분이고 여러분이어야 합니다. 저마다 지닌 선함과 정의와 생명과 평화의 힘을 확신하고 집중하여 키우는 것이 하느님 나라를 이 지상에 세우는 길입니다.


욕심과 물욕, 개인주의와 이기심을 비우고, 그 자리를 사랑과 자비로 가득 채워 하느님께로 진실로 회심할 수 있는 귀한 시간입니다. 순례는 하느님께로 향한 회심의 길을 내고 이어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곳 어디든 함께 계시겠노라 하십니다. 우리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 하시겠노라 하십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 우리가 가야할 곳이 어디입니까.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입니다.

 

 

 

 

 

 

출처 : 평화의 길, 생명의 길, 사람의 길(평생사랑)을 찾아서
글쓴이 : 생명평화마중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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