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1 독서(이사 25,6-10ㄴ)는
주님께서 베푸실 잔치에 대하여 말합니다.
주님께서 높은 산에 모든 백성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베푸시겠다고 합니다.
그 잔치는 매우 풍요로운 것은 물론,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겠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누구신지 잘 모르는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당신을 드러내시고,
백성들이 하느님을 뵙게 된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직접적인 통치를 하시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잔치를 베풀어주시고,
이스라엘의 지난날의 고통을 없애주시기 위해
고통을 없애주실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며,
그분께만 희망을 걸고,
그분의 구원에 대하여 기뻐하라고 희망을 불어넣는 노래를 부릅니다.
특히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7절)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하여 죽음을 없애주실 것(1코린 15,54; 묵시 21,4)을 예언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오늘 제2 독서(필리 4,12-14.19-20)는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풍요로움을 고대하라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선포하면서 겪었던 어려움들을 잘 이겨냈음을 말하면서
그렇게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힘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힘을 믿고
바오로 사도는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었으며,
복음을 잘 선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필리피 공동체가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인
에파프로디토스를 잘 맞이해서 도와주었던 일(필리 2,25-30)을 기억하면서
자기가 겪는 환난에 필리피 공동체 신자들이 동참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공동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풍요로움으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마태 22,1-14)은
회개하지 않고 잔치만 즐기려는 이의 운명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3-44)와 비슷한 것으로서
임금 혼자서 모든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3-7절; 8-13절).
마지막 구절은 혼인잔치의 비유에 대한 결론입니다.
두 부분 모두 임금의 초대로 시작되고, 초대하려고 종을 두 번씩 보냅니다.
첫 번째 초대는 실패했지만 두 번째 초대는 성공했습니다.
그렇지만 두 초대 모두 불행한 결과로 끝을 맺습니다.
첫 번째 초대의 불행은 초대받고 거절한 사람들에 대한 보복이고,
두 번째 초대의 불행은 예복을 입지 않았던 한 사람에 대한 추방이었습니다.
임금은 하느님 아버지로,
혼인잔치의 주인공은 예수님(마태 9,15)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임금이 베푸는 혼인잔치이기 때문에
분명히 중요한 인물들이 초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한이 두렵지도 않았는지 초대받은 이들이 모두 거절했고
임금은 또 다른 종을 보내면서
오늘 제1 독서에서처럼
주님께서 베푸시는 잔치라서 대단히 풍요로운 잔치임을 알리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이들은
오히려 초대를 알리는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이라 여겨졌던 유다인들(마태 8,12)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임금의 진노는 군대를 보내서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 고을을 불살라 버리기까지 합니다.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멸망을
오늘 복음에서 보여준 임금의 진노가 실현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임금은
마지막으로 다른 종들에게
고을 어귀로 나가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초대하라고 명령합니다.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고 합니다(10절).
마치 소출을 내는 민족들에게 포도밭을 임대하겠다는
포도밭 주인의 말처럼(마태 21,43)
혼인잔치는 새롭게 초대받은 사람들로 꽉 들어찼습니다.
이제 서서히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잔치는 행복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관습에 따른다면 혼인잔치에서
주인은 초대한 이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게 된다고 합니다.
그때 혼인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이가 임금의 눈에 크게 띠었습니다.
전통에 의하면 혼인 예복은
특별한 옷이 아니라 깨끗하고 축제에 걸맞는 화려함을 갖춘 옷이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길거리에서 초대받고 즉시 왔기 때문인지 예복을 입을 시간도 없었나봅니다.
혹시 길거리에서 헤매던 거지일지도 모를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임금은 하인들에게 예복을 갖추지 못한 채 온 사람의 손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지라고 합니다(13절).
예수님을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이라고 하는 이들(마태 8,12)과
한 탈렌트를 땅에 숨겨두었던 쓸모없는 종의 운명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마태 25,30).
또한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의 운명(마태 13,37-43)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혼인 예복이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마태 3,8)이며,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마태 21,31)이고,
포도밭을 임대한 뒤 제 때에 소출을 잘 내는 것(마태 21,41.43),
즉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이 적다.”(14절)고 하시는 것입니다.
단지 초대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잔치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라면
초대에 걸맞는 품위를 지키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할 때 혼인잔치에서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느님의 말씀에 충실한 사람들(마태 24,42-25,30)만 구원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문이 넓고 길도 널찍해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문이 좁고 길도 비좁은 곳으로 가는 사람은 적은데
그 문은 생명으로 이끄는 문이라는 말씀(마태 7,13-14)을 반복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에 일하러 가라고 했던 두 아들의 비유(마태 21,28-32: 연중 26주일)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3-44: 연중 27주일)에 이어
세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예수님의 관계와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의
운명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성사를 받고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혼인잔치에 걸맞는 예복을 입을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입어할 예복은 예수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사는 삶입니다.
우리도 역시
최후의 날에 회개의 열매라고 내놓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것과 사랑의 열매를 얼마나 잘 맺었고,
제 때에 소출을 바쳤는가에 따라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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