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공격적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이 말씀을 듣고 곤혹스런 얼굴을 하고 있을 사제들과 원로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사회적인 지위와 체면이 있지... 그들에게는 세리나 창녀와 비교당하는 것 자체가 굴욕적입니다. 그런데 세리나 창녀가 그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니 그만한 모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반박도 하기가 힘듭니다. 주님께서는 용의주도하게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미리 그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막아버리셨습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며 다그치시고, 늦게라도 일하러 나간 맏아들이 말만하고 실천하지 않는 둘째보다는 낫다는 동의를 그들에게서 미리 받아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 제대로 걸려 든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구경꾼의 입장에서 그들의 당하는 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보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석사제와 원로들처럼 폼만 잡으면서 회개할 줄은 모르는 사람, 둘째 아들처럼 대답은 잘하면서 행동은 굼뜬 신앙인이 누구겠습니까?
그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제 이야기였습니다. 결국은 그들과 공범의식을 느끼게 되면서 차츰 제 마음이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을 옹호하는 쪽으로 변해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 그래도 세리나 창녀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말씀 너무 심하신 것은 아닌지요... 그들도 처음부터 아버지 말씀을 어기려고 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살다보니 상황이 여의치 않아 약속을 못 지킨 것뿐이겠지요. 처음부터 싫다고 거절하면서 복장 터지게 하는 것 보다야 그래도 대답이라도 잘하는 것이 백번 낫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처럼 되지도 않은 말로 옹호하고 스스로의 위안으로 삼아보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동안 습관적으로 주님께 드렸던 뻔뻔스러운 대답들이 너무나 많이 떠오르는 것이 더 이상 우기기가 힘들어집니다.
오늘 주님의 가르침은 간단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늦게라도 마음을 바꾸어 아버지의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문은 너무나 쉽게 ‘예’라고 말하고는 아무런 갈등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삶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제대로 ‘예’라고 응답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 넓게 열려져 있을 것입니다. 수석사제나 원로들처럼 오만과 아집에 사로잡혀 전혀 변화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보다는, 세리와 창녀들처럼 늦게나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강한 질책을 떠올리며, 또 다시 공수표가 될지라도 한 번 더 큰 소리로 대답을 해 봅니다. ‘예, 주님. 이번에는 굳은 마음을 지니고 제대로 한번 순종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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