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2008년 9월 6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도구 Ludovicus 2008. 9. 6. 04:59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8년 9월 6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코린토 1서 4,6ㄴ-15

6 형제 여러분, 나는 나 자신과 아폴로에게 적용시켜 이야기하였습니다. 여러분이 ‘기록된 것에서 벗어나지 마라.’ 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배워, 저마다 한쪽은 얕보고 다른 쪽은 편들면서 우쭐거리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7 누가 그대를 남다르게 보아 줍니까?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
8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제쳐 두고 이미 임금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임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임금이 될 수 있게 말입니다.
9 내가 생각하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사도들을 사형 선고를 받은 자처럼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입니다.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명예를 누리고 우리는 멸시를 받습니다.
11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12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 주고, 박해를 하면 견디어 내고, 13 중상을 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14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런 말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나의 사랑하는 자녀로서 타이르려는 것입니다. 15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끌어 주는 인도자가 수없이 많다 하여도 아버지는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복음 루카 6,1-5

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2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5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지금 현재 우리 성당에서는 공사 중입니다. 성당 옆 학교를 인수해서 저희 성당의 교육관으로 쓰일 예정입니다. 하지만 그대로 쓰기란 문제가 많아 리모델링 작업을 시작했지요. 그리고 성당 입구를 변경하고,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야외에 세워져 있던 성모님을 교리실로 잠시 옮겼습니다. 그런데 그 뒤 재미있는 현상을 하나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성모상이 그 자리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성모상이 놓여 있었던 자리를 향해서 계속해서 인사하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당연히 성모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인사를 하는 것이지요. 즉, 성모상은 보지도 않고 습관적으로 인사할 뿐입니다.

문득 이 모습이 우리들의 신앙생활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또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습관적으로만 하는 신앙생활. 그래서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사랑이라는 단어만을 끊임없이 습관적으로 입으로만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할 대상이 어떠한 지를 바라보아야 하겠지요. 그리고 어떤 사랑을 해야 할 지를 제대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그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습관적으로만 말하는 사랑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 사람 몇 사람이 또 예수님께 따지지요.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즉,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것인데요. 단순히 배고파서 길 가에 있는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은 것이 자신들의 눈으로는 추수와 타작을 한 것으로 비춰진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과 판단만을 옳다고 내세우는 곳에서 과연 사랑이 있을까요? 율법의 최고 계명이 ‘사랑’에 있음을 알고 있어도, 그 사랑은 습관적으로 말만 할 뿐 실천이 없는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느 여학교에 남자 선생님께서 새로 부임해 오셨습니다. 긴장되는 첫 번째 수업이었지요. 그런데 수업에 들어왔는데, 잠시 뒤 여학생들이 키득키득 웃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이 선생님의 남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학생 한 명이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앞문 열렸는데 데요.”

이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지 앞의 지퍼가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아주 근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반장 나와서 닫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또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엉뚱한 사랑을 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모상에 인사할 때 습관적으로 하지 말고 눈을 맞추고 인사합시다.



주는 만큼 받는 게 아니다(이광윤,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어떤 이는 조금, 어떤 이는 많이, 또 어떤 이는 아주 많이, 그런데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상대방이 내가 저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사랑은 알맞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는 만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할 수 있는 한껏 하는 것이고, 줄 수 있는 한껏 주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을 덜 받고 있다고 생각될 때는 내가 그를 정말 한껏 사랑했는지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좀 더 사랑할 수는 없었던가를.

사랑은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바치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 여유로움을 떼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낮추어 상대방을 받드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는 내가 얼마나 겸손한 자세로 그를 높이고, 얼마만큼 진심으로 그를 위해 내 것을 버렸는가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나부터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 몸을 낮추고, 내 생각을 낮추어야 합니다. 죄에 찌들어 죽어가는 우리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새 삶을 얻는 변화를 주기 위하여, 자기 몸을 가장 비천한 죄인의 모습으로까지 낮추어 십자가의 고통을 감수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며 우리가 그를 닮은 자세로 임한다면,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을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을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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