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2008년 9월 3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도구 Ludovicus 2008. 9. 3. 07:33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8년 9월 3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제1독서 코린토 1서 3,1-9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3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는데, 여러분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4 어떤 이는 “나는 바오로 편이다.” 하고 어떤 이는 “나는 아폴로 편이다.” 하고 있으니, 여러분을 속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5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6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7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8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9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복음 루카 4,38-44

38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39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41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2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펜실베이니아로 가는 중앙 보도에 층계가 있다고 합니다. 이 층계는 실력과 성실성이 널리 알려진 ‘옴스테드’라는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한 것이라는데, 글쎄 이상하게도 그 층계에서 넘어지는 사람이 유난히 많은 것입니다.

한번은 그 층계에서 넘어져 부상당한 한 시민이 그를 찾아가 강력히 항의했지요. 그러자 옴스테드가 말합니다.

“나는 그 층계를 건축하기 위하여 내 집에 나무층계를 만들어놓고 오르내리며 오랫동안 실험한 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하자가 있을 리 없습니다. 좀 조심해 걸으시지, 제 책임이 아니라니까요.”

옴스테드의 말에 부상당한 사람은 화가 치밀었으나 할 말이 없었지요. 수십 차례를 실험한 끝에 내린 결론이라니까요. 그런데 걸어가는 옴스테이를 살펴보니 조금 이상한 것입니다. 그는 다리에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즉, 옴스테이는 한쪽 다리가 다른쪽 다리보다 짧은 것입니다.

스스로 실험을 했지만, 모든 사람이 이러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따라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맞는 이 층계가 정상인 사람에게 맞을 리가 없을테고, 사람들이 계속 넘어져서 부상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나의 판단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참으로 많이 만납니다. 물론 저 역시도 제 판단이 맞다고 박박 우길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되돌아보면 내 판단이 꼭 맞는 것은 아니구나 싶어요.

제가 신학생 때 좀 못살게 했던 후배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후배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들이 하는 유행을 다 따라하는 이 후배의 모습이 신학생으로써 맞지 않다고 생각을 했고, 그래서 많이 혼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후배가 따르는 유행을 훗날에는 저도 똑같이 따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삐삐라고 불리던 호출기가 그랬고, 휴대전화가 그랬으며, 머리에 무쓰나 젤을 바르던 모습 역시 나중에는 저의 모습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내 판단이 옳다는 것. 그것처럼 어리석은 모습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도 이 어리석은 모습을 오늘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고을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십니다. 그러자 군중들은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군중들만의 판단이지요. 주님의 뜻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 전하는 것인데, 주님의 뜻을 자신의 뜻 아래에 놓으려는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고자 할 때 그래서 주님을 소유하려고 할 때, 주님의 뜻을 이 세상에 드러낼 수가 없게 됩니다. 나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보다 더 겸손한 모습으로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함께 일을 합시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앨리스 휘톤, ‘용서’ 중에서)

회의나 발표를 하는 자리에서 나는 청중에게 질문 하나를 던진다. “여러분 인생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가장 흔하게 나오는 대답이 바로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평범한 직장이든 고위직이든 모든 사람이 이 두려움으로 고통 받는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이 두려움이 없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적합한 매너나 사회적인 감수성을 기를 수 없을 것이다. 둥굴에 사는 한 부족 사람들이 구성원 한 명을 쫓아내려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다른 사람들에게 거절당한 그 사람은 아마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 거절에 대한 두려움은 바로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직결된다. 그런데도 이런 두려움이 없다면 그 사람은 부족의 안녕에 공헌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자신이 불안해하고 자신감도 부족한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거절에 대한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사회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모두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관한 것이다. 내가 요구한 것을 상대방이 거절하는 경우, 내가 속한 팀에서 내가 환영받는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를 발견한 경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무시무시한 결과가 몰아닥칠지 미리 추측한다.

그런데 나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려면 반드시 다른 이에게 “Yes”라는 대답만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기꺼이 “No”라는 대답도 받아들인다면 성공할 기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우리는 거절을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졌다. 이것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관점으로 생각한다면 이 두려움을 다스릴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힘을 기를 수는 있다.

“거절을 두려워하는 마음, 네가 내 속에 들어와 살 수는 있겠지만 결코 나를 지배할 수는 없어. 너는 새로운 기회를 탐색하고 일과 인생에서 더 큰 게임을 즐기려는 나를 막을 수 없어.”

이런 태도를 취하면 두려움이 당신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두려움을 소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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