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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종환님의 글 모음

도구 Ludovicus 2007. 7. 2. 09:46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말없이 마음이 통하고, 
그래서 말없이 서로의 일을 챙겨서 도와주고, 
그래서 늘 서로 고맙게 생각하고 
그런 사이였으면 좋겠습니다. 
방풍림처럼 바람을 막아주지만, 
바람을 막아주고는 그자리에 
늘 그대로 서 있는 나무처럼 
그대와 나도 그렇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이 맑아서 산 그림자를 깊게 안고 있고, 
산이 높아서 물을 늘 깊고 푸르게 만들어 주듯이 
그렇게 함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산과 물이 억지로 섞여 있으려 하지 않고 
산은 산대로 있고 물은 물대로 거기 있지만,
그래서 서로 아름다운 풍경이 되듯
그렇게 있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침묵 
꽃들에게 내 아픔 숨기고 싶네내 
슬픔 알게 되면 
꽃들도 울 테니까 
얼음이 녹고 다시 봄은 찾아와 
강물이 내게 부드럽게 말 걸어올 때도 
내 슬픔 강물에게 말하지 않겠네 
강물이 듣고 나면 나보다 더 아파하며 
눈물로 온 들을 적시며 갈 테니까 
겨울이 끝나고 북서풍 물러갈 무렵엔 
우리 사랑 끝나야 하는 이유를 
나는 바람에게도 말하지 않겠네 
이제 막 눈을 뜨는 햇살에게도 
삶이 왜 괴로움인지 말하지 않겠네 
이제 막 눈을 뜨는 햇살에게도 
삶이 왜 괴로움인지 말하지 않겠네 
새 떼들 돌아오고 들꽃 잠에서 깨어나도 
아직은 아직은 말하지 않겠네
떠나는 사랑 붙잡을 수 없는 진짜 이유를 
꽃들이 듣고 나면 
나보다 더 슬퍼하며 
아름다운 꽃잎 일찍 떨구고 말 테니까 

사랑하는 당신은
저녁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 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 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아름다운 길
너는 내게 아름다운 길로 가자 했다 
너와 함께 간 그 길에 꽃이 피고 단풍 들고 
길 옆으로 영롱한 음표들을 던지며 개울물이 흘렀지만 
겨울이 되자 그 길도 
걸음을 뗄 수 없는 빙판으로 변했다 
너는 내게 끝없이 넓은 벌판을 보여달라 했다 
네 손을 잡고 찾아간 들에는 온갖 풀들이 손을 흔들었고 
우리 몸 구석구석은 푸른 물감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빗줄기가 몰아치자 몸을 피할 곳이 없었다 
내 팔을 잡고 놓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넘어질 때 너도 따라 쓰러졌고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세찬 바람 불어올 때마다 
너도 그 바람에 꼼짝 못하고 시달려야 했다 
밤새 눈이 내리고 날이 밝아도 
눈보라 그치지 않는 아침 
너와 함께 눈 쌓인 언덕을 오른다 
빙판 없는 길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하며 함께 꽃잎 같은 발자국을 눈 위에 찍으며 
넘어야 할 고개 앞에 서서 다시 네 손을 잡는다 
쓰러지지 않으며 가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눈보라 진눈깨비 없는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고요한 물
고요한 물이라야 고요한 얼굴이 비추인다 
흐르는 물에는 흐르는 모습만이 보인다 
굽이치는 물줄기에는 굽이치는 마음이 나타난다 
당신도 가끔은 고요한 얼굴을 만나는가 
고요한 물 앞에 멈추어 가끔은 깊어지는가

세월
여름오면 겨울 잊고 가을오면 여름 잊듯 
그렇게 살라한다. 
정녕 이토록 잊을 수 없는데 
씨앗들면 꽃 지던 일 생각지 아니하듯 
살면서 조금씩 잊는것이라 한다. 
여름 오면 기다리던 꽃 꼭 다시 핀다는 믿음을 
구름은 자꾸 손 내저으며 그만두라 한다. 
산다는 것은 
조금씩 잊는 것이라 한다. 
하루 한낮 개울가 돌처럼 부대끼다 돌아오는 길. 
흔들리는 망초꽃 내 앞을 막아서며  잊었다 
흔들리다 그렇게 살라한다. 
흔들리다 잊었다 그렇게 살라한다. 

억새풀
당신이 떠나실 때 
내 가슴을 덮었던 
저녁 하늘 
당신이 떠나신 뒤 
내 가슴에 쌓이는 흙 한 삽 
떠나간 마음들은 
이런 저녁 어디에 깃듭니까 
떠도는 넋처럼 가~으내 
자늑자늑 흔들리는 억새풀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벚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멀리 가는 물 
누구나 처음에는 맑은 마음으로 
산골짝을 나서는 여린 물줄기였지 
세월이 흐르고 먼 길을 가다 보면 
흐린 물줄기 때묻은 것들과 
뒤엉켜 흐르게 되지 
그러다 그만 거기 멈춰버린 물들은 
또 얼마나 많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멀리 가는 물 있으니 흐린 물줄기를 만나도 
때묻은 물줄기와 뒤엉켜도 
다시 맑아지며 
멀리 가는 물 있으니 
보아라 보아라 
저기 멀리 가는 물을 

이 세상이 쓸쓸하여
이 세상이 쓸쓸하여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 
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 
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 
파도는 그치지않고 제 몸을 몰아다 바위에 던지고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글 한 줄을 씁니다 
사람들도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하고 
이 세상 가득 그대를 향해 눈이 내립니다 

저녁노을
당신도 저물고 있습니까 
산마루에 허리를 기대고 앉아 저녁해가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는 동안 
뿜어져나오는 해의 입김이 
선홍빛 노을로 
번져가는 광활한 하늘을 봅니다 
당신도 물들고 있습니까 
저를 물들이고 
고생대의 단층 같은 구름의 물결을 물들이고 
가을산을 물들이고 
느티나무 잎을 물들이는 게 
저무는 해의 손길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구름의 얼굴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노을처럼 
나는 내 시가 당신의 얼굴 한쪽을 
물들이기를 바랐습니다 
나는 내 노래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당신을 물들이고 
사라지는 저녁노을이기를, 
내 눈빛이 한 번만 더 당신의 마음을 흔드는 
저녁 종소리이길 소망했습니다 
시가 끝나면 곧 어둠이 밀려오고 
그러면 그 시는 내 최후의 시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내 시집은 그때마다 
당신을 향한 최후의 시집이 될지 모른다는 
예감에 떨었습니다 
최후를 생각하는 동안 
해는 서산을 넘어가고 
한 세기는 저물고 
세상을 다 태울 것 같던 열정도 재가 되고 
구름 그림자만 저무는 육신을 전송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저물고 있습니까 
스러져가는 몸이 빚어내는 선연한 열망 
동살보다 더 찬란한 빛을 뿌리며 
최후의 우리도 그렇게 저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무는 시간이 마지막까지 빛나는 시간이기를, 
당신과 나 우리 모두의 하늘 
위에 마지막 순간까지 
맨몸으로도 찬연하기를 

다시 피는 꽃 
가장 아름다운 걸 버릴 줄 알아 
꽃은 다시 핀다. 
제몸 가장 빛나는 꽃을 
저를 키워준 들판에 거름으로 돌려 보낼 때 
꽃은 봄이면 다시 살아난다. 
가장 소중 한걸 미련 없이 버릴 줄 알아 
나무는 다시 푸른 잎을 낸다; 
하늘아래 가장 사랑스러웠던 열매도 
저를있게한 숲이 원하면 되돌려 줄 줄 알아 
나무는 봄이면 다시 생명을 얻는다. 
변치 않게 아름다운것은 없다. 
나무도 풀 한포기도 사람도 
영원히 가진 것을 누릴 수는 없다. 
그것을 바라는 건 욕심이다. 
바다 까지 갔다가 제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오는 연어 
제 목숨 다 던져서 수 천의 알을 낳고 
조용히 물밑으로 들어가는 연어를 보라. 
물고기 한마리도 
영원히 살고자 할때는 저를 버리고 가는 걸 보라 
저를 살게한 강물의 소리 알아 듣고 
물밑 가장낮은 곳으로 말없이 되돌아가는 
물고기를 보라 
제가 뿌리 내렸던 대지의 목소리을 알아듣고 
아낌없이 가진것 내주는 꽃과 나무 
깨끗이 버리지 않고는 
영원히 살 수가 없다는...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 없이 그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앞에 운명처럼 파여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발길이 데려오는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에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몹시도 괴로웠다 
어깨위에 별들이 뜨고 
그 별이 다 질 때까지 마음이 아팠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게만 느껴지는 날에는 
내가 그에게 처음 했던 말들을 생각했다 
내가 그와 끝까지 함께하리라 마음 먹던 밤 
돌아오면서 발걸음마다 심었던 맹세들을 떠올렸다 
그 날의 내 기도를 들어준 별들과 저녁 하늘을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랑도 모르면서 미움을 더 아는 듯이 쏟아버린 
내 마음이 어리석어 괴로웠다 
글... 도종환 // 그림...  김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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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피아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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