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식(로제리오)의 삶과 노래
절집에 온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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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8.2. 김정식 http://cafe.daum.net/cchereandnow 가톨릭인터넷언론 지금여기 |
인간개발연구원에서 주최한 <섬머포럼>의 강의를 위해 제주에 갔다. 태풍이 온다하니 행여 강의 당일 항공편이 결항될까봐 하루 미리 가는 터라 동양 최대의 불사라는 약천사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했다. 고향의 이웃집 누나가 비구니 스님이 되어 여름철을 그 절에 머무르는 덕에 따뜻한 배려를 받을 수 있었지만, 수면장애가 있는 내게 고요한 절집은 언제나 최상의 은신처가 되어준다.
어느 사찰이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저녁 예불 후에 공양이 이어지므로, 설령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가더라도 예불을 함께 드리고 공양간으로 가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제주 출신이라는 젊디젊은 비구 스님을 따라 대웅전으로 가는 돌계단을 오르는데 문득 내 목에서 달랑거리는 나무십자가가 눈에 들어온다. 가만히 윗옷 안으로 넣는 순간 전혀 뒤를 돌아다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스님이 한 마디 하신다. “십자가를 굳이 감추지 않으셔도 됩니다.” 스님들은 뒤에도 눈이 달린 것 같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스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어진 내 대답이었다.
예불을 드리면서 생각했다. 어떻게 잠시 생각할 틈도 없이 그런 대답이 바로 나왔을까? 마치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그렇지 않아도 가끔씩 아내가 그것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었다. “당신은 돗자리를 하나 깔고 앉아서 선문답을 하면 좋을 것 같아. 사고가 한없이 자유롭기에 어떤 문제든지 막힘없이 술술 접근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바라본 것을 빼어난 언변술로 잘 표현해 내잖아. 당신 말을 듣고 있으면 세상에 아무 문제도 없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니까. 종종 어떤 기회에 당신의 강의를 듣고 있을 때도 ‘저 사람이 내 남편인가?’ 싶을 정도로 당신의 얘기는 선문답에 가까워. 그러니 모든 인종과 종파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의 어려움을 듣고 즉시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상담센터 같은 것을 해보면 좋을 것 같아. 때로 위로 삼아 노래도 들려주면 더 좋겠네.”
어린 날 우리 동네에서 고시공부를 하러 산으로 들어갔다는 사람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톨릭 신자인 그가 절간에서 공부를 하다가 주일날 미사시간이 되면, 싸들고 간 십자고상을 책상 위에 놓고 기도를 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스님께서 들어오시는 기척을 들었다. 얼른 감추었기에 스님께서 전혀 보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스님들은 벽을 뚫고 보는 투시력도 있나보다. “그 십자가를 꺼내 놓으시게. 이곳이 절집이지만 자네가 십자가를 걸어 놓고 기도를 하는 순간에는 성당이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나의 본심이 어디로 향하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네. 분별심을 버리고 앞으로는 벽에 걸어 놓고 기도를 하시게.” 하시면서 손수 못을 쳐 십자고상을 걸어주셨다고 한다. 어린 마음에도 이 넓은 배려가 맑은 향기로 스며서 내 가슴에 아직까지 남아있다.
많은 종교학자들이 지구상의 종교 중에 가장 고급종교라고 일컫는 힌두교의 경전 우파니샤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수십억의 사람이 살고 있고, 그 수십억의 사람들이 각각 다른 신을 경배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돈독해지도록 기도하노라.
그날 약천사의 예불은 이런저런 번뇌가 없지 않았지만, 중간에 날아 들어온 팔관조의 자지러지는 듯한 아름다운 소리와 함께 내 가슴에 한 줌 맑은 바람으로 남아있다. 내게 있어 선문답은 언감생심이지만, 늘 자연스럽고 자유스럽게 살고 싶은 마음을 간직하고 있고, 실제로 그리 살도록 나를 잘 보살피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내게는 최선의 선택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전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더 나아가 다른 이의 선택을 기꺼이 존중하고 싶다. 어떤 순간에 어떤 화두가 다가와도 주눅 들거나 위축되지 않고 편안하고 자유롭게 내 생각을 나눌 수 있음은, 아마도 그런 삶의 지향에서 비롯된 자신감 때문이 아닐까?
김정식/ 로제리오, 가수 겸 작곡가 사진 - 고태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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