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오늘의 말씀

[스크랩] 2008년 7월 24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도구 Ludovicus 2008. 7. 24. 07:03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8년 7월 24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제1독서 예레미야 2,1-3.7-8.12-13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가서 예루살렘이 듣도록 외쳐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젊은 시절의 순정과 신부 시절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너는 광야에서, 씨 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
3 이스라엘은 주님께 성별된 그분 수확의 맏물이었다. 그를 삼키는 자들은 누구나 벌을 받아 그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주님의 말씀이다.
7 “내가 너희를 이 기름진 땅으로 데려와 그 열매와 좋은 것을 먹게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여기 들어와 내 땅을 더럽히고, 나의 상속 재산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다.
8 사제들도 ‘주님께서 어디 계신가?’ 하고 묻지 않았다. 율법을 다루는 자들이 나를 몰라보고, 목자들도 나에게 반역하였다. 예언자들은 바알에 의지하여 예언하고,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것들을 따라다녔다.
12 하늘아, 이를 두고 깜짝 놀라라. 소스라치고 몸서리쳐라. 주님의 말씀이다. 13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복음 마태오 13,10-17

그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화원에 진열되어 있는 예쁜 꽃을 보게 되었지요. 그는 돈을 치르고는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너무나도 예쁘고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꽃이었기에 매일 매일 물을 주고 온갖 정성을 기울여서 가꾸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꽃은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 가는 것입니다. 결국 화분 안의 꽃은 완전히 사라져 죽고 말았지요. 이 사람은 화가 나서 화원을 찾아가 따졌습니다.

“이렇게 형편없는 꽃을 팔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온갖 정성을 기울였지만, 점점 시들더니만 이렇게 죽고 말았습니다.”

화원 주인은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이 꽃나무는 물을 일주일에 한 번씩 조금씩만 주면 아무런 문제없이 잘 자라거든요.”라고 말을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사람은 알았지요. 이 꽃은 일주일에 한 번씩, 그것도 아주 조금의 물만 줘야 하는 꽃이라는 것을. 그러나 자신은 정성을 기울인다고 매일 매일 물을 듬뿍듬뿍 주어서 꽃나무의 뿌리가 썩고 만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사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계명을 사랑의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느님을 알아야 그리고 이웃을 알아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잘 알 수 있도록 쉽게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지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우리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쉽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쉽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들은 얼마나 주님을 알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을까요? 이렇게 쉽게 다가오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알지 않으려는 우리들의 무성의함에 주님과 나의 관계가 더욱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서 ‘저는 당신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라는 무책임한 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사실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많은 대화를 해야 합니다. 지금 나와 가장 친한 친구를 생각해보세요. 그 친구와 친해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친구와 대화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친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친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한 바로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분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시는 분, 혹시 기도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을 모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기도하세요. 지금은 주님을 알기 위해 기도가 필요할 때입니다.



분명한 것과 희미한 것(‘좋은 글’ 중에서)

분명히 아는 것과 희미하게 아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분명히 아는 것은 내 것이지만,
희미하게 아는 것은 남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사랑하는 것과 희미하게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분명히 사랑하는 것은 아름답지만,
희미하게 사랑하는 것은 추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믿는 것과 희미하게 믿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분명히 믿으면 신뢰받지만,
희미하게 믿으면 의심받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떠나는 것과 희미하게 떠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분명히 떠나면 새로운 것을 얻게 되지만,
희미하게 떠나면 과거에 얽매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바라는 것과 희미하게 바라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분명히 바라는 것은 이루어지지만,
희미하게 바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말하는 것과 희미하게 말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분명히 하는 말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만,
희미하게 하는 말은 나를 뒤로 물러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좋은 생각과 희미한 좋은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분명한 좋은 생각은 나를 자유롭게 하지만,
희미한 좋은 생각은 나를 얽매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출처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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