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5년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역사적인 해이다. 세계 교회 역사상 그 유래가 없이 자생적으로 설립된 한국 천주교회는 그 해 김대건 신부의 사제 서품과 귀국으로 비로소 명실 상부한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솔뫼는 바로 한국 최초의 사제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로서, 성인이 박해를 피해 조부 김택현을 따라 용인 땅 골배마실로 이사 갈 때인 일곱 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라는 뜻을 가진 '솔뫼'는 충남 당진군 우강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이곳은 김해 김씨 안경공파인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1814년 순교), 종조부 김한현(1816년 순교), 부친 김제준(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 바로 이곳에서 김 신부는 1846년 사제품 받은 지 1년 만에 순교하기까지 그의 삶을 채웠던 뜨거운 신앙과 열정을 배웠던 것이다.
이 작은 마을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김대건 신부의 조모 이씨의 삼촌이며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그의 고향인 충청도 지방의 전교를 맡으면서 시작된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 생활에 전념한다. 그로부터 이곳 솔뫼는 교우촌이 된다.
하지만 1791년 전라도에서 제사 문제로 일어난 진산 사건으로 그 역시 박해의 회오리에 휩쓸려 홍주, 전주, 공주 등지의 옥에 갇히게 되고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귀양을 떠나야만 했다. 그 후 귀양에서 풀려 돌아온 후 1805년 또다시 붙잡혀 해미 감옥으로 끌려가고 이곳에서 10년간 옥중 생활을 하던 중 1814년 마침내 76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그 후 7년이 지난 1821년 8월 21일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김대건 신부는 재복이라는 아명으로 골배마실에서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갈 때까지 소년 시절을 보낸다. 당시 김대건 일가가 살던 집은 아흔아홉 간이나 되는 큰 집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우물과 집터만 남아 있고 대나무들이 주위에 있다.
솔뫼에서 대대로 명망이 높았던 김씨 가문이었지만 김진후의 15년간의 긴 옥중 생활로 가세가 기울어 신앙을 지키고 살기가 어려워져만 갔다. 셋째 아들 한현은 부친이 옥중에 있을 때 경상도 안동 땅으로 피난을 갔다가 잡혀 1816년 대구 감영에서 순교했다. 둘째 아들 태현은 1827년에 그의 아들 김제준과 김대건 등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 땅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삶의 터를 옮겼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과 땅이 있는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김씨 일가의 피난길은 설움과 눈문이었지만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모방 신부로부터 성세와 견진 성사를 받고 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한다. 그 역시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돼 그 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마카오로 유학을 간 신학생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돼 그 해 10월 귀국한다. 귀국 후 첫 사목지를 은이 마을로 정한 뒤 공소를 차려 용인 일대의 사목을 시작한다. 하지만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모친 역시 귀국 후 잠시 얼굴을 대했을 뿐, 김 신부 역시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만인 1846년 9월 새남터에서 장렬한 순교로 일생을 마감한다. 1814년 김진후로부터 시작돼 김대건 신부까지 30여 년 동안 김씨 일가는 4대가 순교의 월계관을 쓰는 신앙의 명가가 된 것이다.
솔뫼 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을 맞은 1946년에 성역화 사업이 시작돼 기념비를 세웠고 생가 터를 매입했으며 성인의 동상과 탑이 건립됐다. 탄생 장소와 생가 터에는 아직도 300여 년의 연륜을 지닌 소나무들이 무성하고 오른편 숲 속에는 김 신부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솔뫼의 역사를 굽어보았던 소나무들이 30여 그루나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있는 우물터에는 아직도 지하수가 솟아나고 있다.
1983년에는 솔뫼 피정의 집이 완공돼 사적지를 찾는 순례자들의 피정을 주선하고 있다. 피정의 집 성당 안에는 김 신부의 영정과 유해가 모셔져 있기도 하다. 또 순례자를 정겨운 시선으로 맞는 솔뫼의 성모상은 한복을 입고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2미터 크기의 상이다.
소나무 숲을 따라 만들어 둔 14처 끝에는 김 신부의 동상이 서 있다. 3미터 높이의 이 청동상은 한국 전통 의상인 갓과 도포를 갖추고 영대를 두른 모습으로 바로 뒤에는 보호자인 성모를 의미하는 흰 탑을 세웠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솔뫼와 다락골 - 첫 한국인 사제들의 생가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과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는 첫 한국인 사제로, 서로 동갑내기인데다가 인척이었으며, 함께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이국 땅에서 서로 의지하며 생활하였다. 다만 김대건 신부가 훗날 피의 순교자며 성인이 된 반면에 최양업 신부는 한국 사제들의 모범이 될 땀의 순교자가 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김대건 신부의 집안이 언제부터 '솔뫼'(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생활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의 집안에서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증조부인 김종현(金淙鉉)이고, 그 때 솔뫼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후 그의 영향을 받아 증조부 진후(비오)를 비롯하여 조부 택현과 종조부 종한(안드레아), 희현(루수)이 입교하였으며, 이러한 신앙 전통이 부친 제준(濟俊, 이냐시오) 성인과 대건 신부에게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821년 대건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증조부인 진후가 1814년에 해미에서 옥사하였고, 종조부인 종한은 경상도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1815년의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이듬해 대구에서 순교한 뒤였다.
김제준 성인이 가족을 이끌고 고향 솔뫼를 떠난 것은 김대건의 소년 시절인 1820년대 중반이었던 것 같다. 이후 그의 가족들은 서울 청파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경기도 용인의 한덕동(寒德洞, 이동면 묵리)을 거쳐 이웃 골배마실(내사면 남곡리)로 이주하였다. 바로 이 곳에서 김대건은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반면에 최양업 신부의 선대는 본래 서울에서 세거하던 집안이었으나, 증조부 최한일(崔漢馹)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 1791년의 신해박해 때 과부가 된 증조모가 아들 인주(仁柱, 최양업 신부의 조부)와 함께 충청도 청양 다락골로 낙향하게 되었다. 인주는 이 곳에서 장성한 뒤 이웃 '새터'(청양군 화성면 농암리)로 옮겨 새 삶의 터전을 가꾸었으며, 차츰 이곳으로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최양업은 1921년에 이 새터 교우촌에서 태어나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과 모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의 신앙을 먹으며 성장하였다.
최경환은 이후 가족들과 함께 다락골 새터를 떠나 서울의 낙동(현 회현동)으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이 곳을 떠나 지방을 전전하였고, 양업의 나이 만 11살이 되던 1832년 무렵에는 과천의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 3동)에 정착하였다. 이 뒤뜸이 마르은 얼마 안 되어 신자들의 비밀 공동체인 교우촌으로 바뀌게 되었다. 양업은 1836년 초 바로 이곳에서 신학생으로 추천되었으며, 경환은 훗날 수리산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솔뫼는 김대건 신부의 가족이 이주한 뒤 교우촌으로서 의미를 잃었다. 반면에 다락골과 새터 교우촌은 계속 유지되었으며, 병인박해 이후 여러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솔뫼 생가 터는 194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후손들에게 매입되었고, 같은 해 6월 4일에는 순교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그 후 대전교구의 '솔뫼 성역화 추진 위원회'에서는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성지 개발을 시작하여 이듬해 동상과 기념탑을, 1983년에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다. 반면에 병인박해 때의 무명 순교자들이 안치되어 있던 다락골 줄무덤은 1982년에야 비로소 청양 본당 교우들이 사적지로 조성하였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8호(1999년 9월호), pp.117-119]
[사진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