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요한 20,24-29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저는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고서 수영장으로 운동을 하러 갑니다. 지난 5월부터 시작을 했으니 벌써 3개월째가 되지요. 이렇게 운동을 하면서 체중도 꽤 많이 줄였고, 또한 아침에 운동으로 시작을 하니 하루를 보다 더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서 수영장으로 가기 때문에 일기예보를 꼭 보고서 출발을 합니다. 특히 요즘 일기예보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실시간 예고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보면 비가 오는지 오지 않는지를 알 수 있고 이로써 자전거를 타고 갈 것인지 아니면 차를 타고 갈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거든요.
어제 역시 새벽 방송을 마치고서 인터넷으로 일기예보를 보았지요. 8시부터 비가 온다고 합니다. 수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에 비가 온다는 것이지요. 갈등이 생겼습니다. 자전거를 탈 것인가 아니면 차를 타고 갈 것인가……. 그러한 갈등 속에서 창밖을 보니, 금방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는 저의 느낌을 믿기로 했지요. 더군다나 일기예보가 정확하게 맞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수영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가면서 저는 크게 후회했습니다. 평소에 잘 맞지 않는 일기예보가 지금은 왜 이렇게 잘 맞는지요? 정말로 정확하게 8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거든요.
비를 맞으면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데, 이러한 생각이 들어요. 분명히 제게 경고를 했는데 그래서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저의 쓸데없는 고집으로 이렇게 비를 맞으면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요.
생각해보니 주님께도 이러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쓸데없는 고집으로 엉뚱한 길로 갈 때가 참으로 많았다는 것이지요. 바로 믿음의 부족이었고, ‘나’라는 틀에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토마스 사도처럼 말이지요.
토마스 사도는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하는 말,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는 말을 믿지 않지요. 대신 그는 사람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세상의 법칙을 굳게 믿었지요. 또한 자신이 직접 보고 만지지 못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정말로 부활하셨지요. 그리고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법칙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법칙을 믿고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나’라는 틀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틀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점을 기억하며 실천할 때, 우리는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마세요.
한발 떨어져서 삶을 바라보면...(‘좋은 글’ 중에서)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곁에서 훈수를 하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면
막상 게임에 임해 있는 사람은 볼 수 없는 수를
자신보다 더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기가 막히게 훈수 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게임에 임하는 당사자는 긴장해 있는 상태라
상황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반면
밖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훈수를 잘 해줄 수 있는 것이지요.
삶이 보이지 않을 때는 때때로
삶에서 한 번 벗어나 보십시오.
나무 하나를 보기 위해서는 산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숲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산에서 멀찍이 떨어져
보아야 하는 것처럼...
어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나,
막막하게만 느껴질 때는 계속
그 문제에 매달려 전전긍긍할 것이 아니라
마음의 평온을 유지한 채 멀찍이에서 바라보면
생각지도 않았던 묘수가 떠오릅니다.
한 걸음 떨어져 삶을 바라보면
삶은 우리에게 소중한 힌트를 주곤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