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힘
- 류해욱 신부
부활 축하드립니다. 특별히 환우분들과 보호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화를 전합니다.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평안하냐?’ 인사를 건네셨듯이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평화를 주십니다. 그분이 주시는 위로와 평화 안에 머무시기를 바랍니다. 당장 가슴에서 알렐루야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서서히 기쁨이 차오를 것입니다.
커피를 끓어넘치게 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고
촛불을 춤추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밤도 밤이 아니다
술잔은 향기를 모으지 못하고
종소리는 퍼지지 않는다
그림자는 언제나 그림자
나무는 나무
바람은 영원한 바람
강물은 흐르지 않는다
사랑이 아니라면
겨울은 뿌리째 겨울
꽃은 시들 새도 없이 말라죽고
아이들은 옷을 벗지 못한다
머리칼이 자라나고
초생달이 부풀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처녀는 창가에 앉지 않고
태양은 솜이불을 말리지 못한다
석양이 문턱에 서성이고
베갯머리 노래를 못 잊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면
미인은 늙지 않으리
여름은 감탄도 없이 시들고
아카시아는 독을 뿜는다
한밤중에 기대앉아
바보도 시를 쓰고
멀쩡한 사람도 미치게 하는
정녕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도 기꺼이 속아주지 않으리
책장의 먼지를 털어내고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사랑이 아니면 계단은 닳지 않고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커피를 끓어넘치게 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고
촛불을 춤추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면......
최영미 시인의 ‘사랑의 힘’이라는 시를 이 밤에 부활 축시로 읽어드립니다. 제가 성 목요일 만찬 미사 강론에서 예수님의 수난, 십자가, 그리고 죽으심이 담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바로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부활의 의미도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바로 사랑의 힘이 부활이라는 놀라운 하느님의 현현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당신 아버지 하느님의 응답이 바로 부활이지요. 예수께서 스스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다만 사랑으로 생명을 내어 놓으셨고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이제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들어 높이신 것입니다. 바로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의 힘이 하느님에 의해 부활로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들, 모두 부활 계란을 받으셨지요? 우리가 흔히 부활의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해 부활 계란을 나눕니다마는 저에게 부활의 이미지는 맑은 물이 흐르는 옹달샘과 같습니다. 마치 옹달샘이 물이 고이듯 모아져서 서서히 땅을 적셔 주듯이 부활하신 그분이 주시는 고요함이 우리의 마음을 평화로 적셔 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분이 우리의 마음을 가만히 사랑으로 적셔 주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사랑의 힘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위대한 힘이 아니라면 무엇이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고 촛불을 춤추게 하겠습니까? 사랑의 힘이 아니라면 무엇이 저 같은 바보가 한밤중에 기대앉아 시를 쓰고, 누가 그런 바보의 시를 읽으며 공감해 주겠습니까?
사랑의 힘이 아니라면, 여러분들 중의 어느 누가 아픈 몸을 이끌고 이곳에서 긴 시간을 기다릴 것이며 교직원들 중에는 누가 병원 언덕을 올라 부활 성야 미사를 함께 하려고 여기 다시 오셨겠습니까? 최영미 시인의 표현대로 사랑이 아니면 계단은 닳지 않고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습니다. 부활은 바로 사랑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아무도 부활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는 사랑의 힘만이 부활하신 그분이 이 밤에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다는 것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밤에 그분이 우리에게 사랑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 빛을 느끼고 그 빛에서 불길을 당겨 우리 가슴의 등불을 켜십시오. 우리가 켰던 부활초는 이 빛의 상징입니다. 이제 실제로 그 빛을 여러분들의 가슴의 등불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이 빛을 켜서 계속해서 간직하지 못한다면 누가 세상에 새로운 생명의 봄을 가져다주겠습니까? 문정희 시인의 ‘우리들 마음 속에’라는 시를 읽어드리며 다시 한번 부활 축하 인사를 드리고 강론에 대합니다.
빛은 해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그대 손을 잡으면
거기 따뜻한 체온이 있듯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 있는
사랑의 빛을 나는 안다.
마음속에 하늘이 있고
마음속에 해보다 더 눈부시고 따스한
사랑이 있어
어둡고 추운 골목에는
밤마다 어김없이 등불이 피어난다.
누군가는 세상은 추운 곳이라고 말하지만
또 누군가는
세상은 사막처럼 끝이 없는 곳이라고
말하지만
무거운 바위 틈에서도 풀꽃이 피고
얼음장을 뚫고도 맑은 물이 흐르듯
그늘진 거리에 피어나는
사랑의 빛을 보라
거치른 산등성이를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길을 보라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하늘
해보다 눈부시고
따스한 빛이 아니면
어두운 밤에
누가 저 등불을 켜는 것이며
세상에 봄을 가져다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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